배타성
내 생각에 이성(합리성, 이로움 등)의 가장 큰 적은 “배타성”이다. 배타성이란 “남을 배척하는 성질”이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남이라는 건 나를 명확하게 규정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나 이외에 것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배척한다는 것은 기준에서 벗어난 것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정리하자면 배타성은 내가 믿고 생각하는 것 말고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이다.
배타적인 사람은 쉽게 배울 수 없다. 나 이외에 존재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앎이란 나의 밖에 있는 것을 탐구해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서 어떻게 배울 수 있겠는가? 설령 가능하더라도 그 속도는 매우 더딜 것이다. 그렇기에 배타적인 사람은 애초에 배워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할 가능성이 있다.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은 변화의 필요성 자체를 무시한다.
배타성은 개인 성장의 제한이 될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배타성은 내가 겪은 것, 내가 살아온 환경, 내가 아는 것 외에는 존재하지 않거나, 악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그런 성향은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도 전에는 몰랐던 것들이며, 나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배타성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고, 공포 앞에선 권력에 기대며, 비합리적이지만 안전을 보장하는 것들에 의지하는 우리의 본성과 만나 거대한 무리를 이룬다.
배타성은 앎과 직결되어 있다. 예상으론 적게 알수록 배타적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배타적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외려 조금 아는 사람일수록 배타적이며, 그 후로는 앎과 반비례 하여 낮아진다. 하지만 특이점 없이는 우리는 “배타적”인 성향 자체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 특이점이 바로 상대성 경험이다.
배타성은 다음과 같은 그래프이다.
배타성의 봉우리는 우리가 조금만 앎으로서 최대한의 배타성을 갖는 지점을 의미한다. 그래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약간 알기 시작한 단계에서 배타성을 갖는다. 그 변화량은 점점 알아가면서 배타성이 줄어드는 변화량을 훨씬 상회한다. 문제는 배타성의 봉우리가 발생하기 굉장히 쉽다는 것이다.
우리는 신뢰와 배타성이라는 모순된 본능을 동시에 갖고있다. 우리는 우리가 전혀 모르는 분야에서는 오히려 의심 없이 믿는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어떤 교수가 그랬다고 하면 곧바로 신뢰한다. 하지만 자기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복잡한 기술이나 과학 같은 경우에는 배타성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이나 심리와 같은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들은 아주 쉽게 배타성의 봉우리에 들어간다. 그런 것들은 큰 노력 없이도 앎의 단계에 진입하기 쉽다. 그가 얼만큼 알고 있는지와 별개로 일단 살아있기만 하면 인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사람들은 배타성의 봉우리에 갇힌다.
배타성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많이 알기만 하면 되는걸까? 1권의 책을 100권 읽은 사람은 배타적이지 않을까? 그래프를 보면 두 번째 변곡점인 상대성을 경험하기 전까지는 배타성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상대성은 내가 알지 못했던 것들이 사실은 존재하며, 그것도 하나의 방식이라는 걸 아는 것이고, 내가 믿었던 게 사실 틀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관건은 그런 상대성을 “경험”했는 가이다. 인간은 경험하기 전에는 온전히 알 수 없다. 부모의 죽음을 보는 것과 경험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는 경험의 영역이고 노력한다고 항상 도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상대성을 경험한다고 바로 포용성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 후로는 노력 여하에 따라 다를 것이다. 나와 다른 의견을 공유하는 걸 즐기는 사람은 더 빠르게 내려갈 것이고, 거기에서 멈추는 사람은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 다양성의 말소는 생명체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결말이며, 다양성은 자연의 법칙이다.
지식의 축복이란 알기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을 알 수 있다는 점이고, 동시에 그 점이 알기 전으론 돌아갈 수 없다는 지식의 저주가 되기도 한다. 배타성을 극복하려는 행위는 엄청난 고통을 수반한다. 수차례 깨지고 무너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잔재에서 싹을 틔울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 존재한다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