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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엉덩이 효과

작성 2024.02.03분류 글주제 사회와 시장

원숭이 엉덩이 효과가 생각보다 우리가 더 집중해야 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숭이 엉덩이 효과는 우리를 사건의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는 주된 원인이다. 연결된 논리들 간에는 약간의 연관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논리를 타고 간 결말은 최초의 본질과는 전혀 관련없는 무언가가 되어 사건의 본질 혹은 주체자나 발화자의 의도를 왜곡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원숭이 효과로 왜곡된 본질을 정치적 목적 혹은 개인의 이득을 위해 사용해도 그 방법이 너무나 교묘하기에 선동되기 쉽다는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의 논리에 스스로가 선동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미 이 효과의 폐단을 경험했다. 순항훈련 때 나와 슬빈이는 노키즈존, 노흑인존 등에 대한 토론 아닌 토론을 했다. 그때 우리의 논쟁은 생각보다 커져서 꽤 긴 시간 이어졌다. 우리는 서로가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예시를 들고와 자신의 주장을 관철했다. 하지만 예시가 쌓이면 쌓일 수록 우리의 입장 차이는 더 극명해졌고, 우리는 서로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사건은 일단락 되었는데 우리는 그 토론의 문제를 “극단적 사례” 때문이라 정의했다. 극단적인 사례를 들면 어느 부분에서 맞을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 문제를 본질에서 멀어지게 한다. “그럼 ~이런 경우엔.” “그러면 ~이런 경우엔” 하면 상황에 맞는 극단적인 사례를 들녀서 자신의 논리를 방어하고 상대의 논리를 공격했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인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진짜 중요한 문제는 차치하고, 감정 싸움으로 번지게 만든다. 극단적 사례도 원숭이 엉덩이 효과의 일부분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이를 “부러진 다리 오류”라고 한다. 한 사람이 내일 극장에 가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그러면서 우발 사태 등에 대비하는데 비가 올 경우, 열차가 지연될 경우 등을 계산해 계획을 세운다. 그러다 “혹시 내일 내가 다리가 부러지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는 다리가 부러졌을 때를 대비해 심혈을 기울인다. 그런데 내일 다리가 부러질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는 쓸데없이 부러지지 않을 다리를 보호하기 위해 시간과 자원을 낭비한다.

이번에 논란이 된 주호민 사건도 마찬가지다. 주호민이 유명해서 욕을 먹는다 같은 이유를 떠나 주호민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도 주호민을 욕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원숭이 엉덩이 효과가 큰 축을 차지한다. 주호민을 욕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리 중 하나로 예시를 들어보자. 그 논리는 바로 특수교사에 대한 동정이다. 즉, “이누특(이제 누가 특수교사 하냐) 논리”다. 당시 초등교사 자살 사건 등으로 시기가 안 좋았던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런 시기적인 우연이 겹치지 않았어도 그런 여론을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혹자들은 이누특이 왜 본질을 흐리는 거냐는 이야기를 한다. 선동에 넘어간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무엇이냐. 장애아와 그 부모 그리고 특수교사 간의 갈등이다. 그니까 특수교사가 문제 행동을 했는가? 그리고 그게 위법한 행동인가? 가 본질이다. 그리고 그건 이미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졌다. 특수교사 측이 위법 행동을 한 게 사실이라면 감형을 받거나 판결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뭘까? 바로 여론을 만드는 것이다. “특수교사가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냐.” “장애인들 케어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데.” 같은 여론이다. 이것은 이미 고전적인 수단이고, 100이면 100 먹힌다. 사법부가 이런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곰곰히 생각해보자. 특수교사의 여건이나 특수학교의 문제점은 구조적인 문제다. 그게 주호민이랑 무슨 상관인가? 특수교사의 여건을 보장해주고, 특수교사를 교육하고 인원을 보충하며, 보수를 늘려주는 일 등은 교육청이 할 일이다. 설령 특수교사가 정말 힘들어서 그런 것이었어도 그런 구조적인 문제의 피해자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정치계는 특수교사를 동정하는 여론에 빠르게 편승해 주호민을 사회의 악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구조적인 문제를 개인 간 문제로 대입했따. 이래도 이게 본질을 흐린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는가?

아직 이해가 안 됐다면 수준에 맞춰 똑같은 논리로 반박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특수교사한테 아동학대 당해도 누가 신고하겠느냐. 공공의 적이 되어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날텐데. 주호민이 특이 케이스라서 이번에만 그런거라고? 그럼 그 선생은? 왜 반대는 성립이 안 되는가?

수많은 대중들이 원숭이 엉덩이를 보고 기차나 백두산을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래도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잖아욧!” 하며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면 학대를 당해 부모를 죽인 자식 사건에서 학대를 당했다는 과거가 감형의 조건이 되잖아!” 하며 극단적인 사례를 들어 또 다시 본질을 흐린다. 존속살인은 그 살인 원인까지 본질에 해당할 수 있는 사례다. 특수 교사는 날 때부터 정해진 운명도 아니고, 본인이 택해서 업으로 삼고 있는 일이다. 어떻게 똑같이 취급 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애초에 대상도 지적장애”아동”이다.

나라고 비인간적으로 “돈 받고 하는 일이니 무슨 일을 당해도 참아야지!”라고 떼쓰는 게 아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해볼 여지도 있다. 근데 내가 올리브영에서 일하는 게 힘들다고 진상 손님한테 염산을 뿌리면 그게 납득이 되는가?

원숭이 엉덩이 효과는 이토록 무시무시하다. 사실 그런 식으로 연관 지으면 세상에 모든 것이 논리가 될 수 있다. 애매한 유용성과 극단적 사례만 있으면 말이다. 우리는 그런 선동에 넘어가면서도 이것이 뭐가 문제인지조차 모른다. 그런 선동들은 감정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나치의 유대인 선동을 생각해봐라. 좀만 생각하면 알 수 있음에도 알려하지 않는다. 그러니 제발 문제의 본질을 한 번만 더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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