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률
24년 1월 4일 슬빈이가 썼던 [황금률]에 관한 나의 의견이다.
- 나는 황금률의 절대성을 부정한다.
황금률을 들으면 “네가 대우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하라.”는 예수의 말을 떠올리지만 이 문장이 황금률이 된 것은 이러한 개념이 기독교, 이슬람교 등을 넘어 불교와 유교까지 동서양을 넘어 인류 문명 전체에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마치 Cash Rules Everything Around Me가 시간과 지리, 문명을 넘어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법칙이듯 말이다.
황금은 지금까지도 가장 가치있는 광석 중 하나다. 재난이 일어난다면 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상승한다. 황금 때문에 인간은 웃고 울며, 속고 속이고, 죽고 죽이는 일을 반복했다. 이제 황금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신성한 무언가가 되었다.
황금률의 맹점은 바로 이름에 있다고 생각한다. “받고 싶은 대로 행하라.”는 말에 황금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써 황금이 가진 권속을 하나의 의견에도 부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은률이나 구리률이었으면 모를까 황금률이라니.
물론 나는 황금률 자체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 말은 대체로 옳다. 내가 받고 싶은 걸 남에게 주고, 받고 싶지 않은 건 남에게 주지 마라. 가슴에 깊게 새길 말이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말”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말 자체로 자연을 모두 담을 수는 없다. 도덕의 원칙에서는 부합하는 말일 수 있으나 실제 세상을 살아가다 생기는 자잘한 일들에선 황금률에 위배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나는 원하지 않는데 상대는 원할 수 있다. 나는 원하는데 상대는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여자친구와 나의 충돌 중 많은 부분이 여자친구가 “나는 이게 좋아서 이렇게 했어.”라는 대목에서다. “나는 토마토를 좋아하니 상대도 좋아하겠지.” 나는 토마토가 싫다.
토마토로 예시를 들었지만 이것보다 개인적으로 훨씬 중요한 일들에도 적용된다. ‘나는 ~상관없으니까 상대도 그렇겠지.’ 개개인은 너무나 다르기에 예측할 수 없다. 사람마다 자라온 환경과 기호, 성향이 모두 다르다. 내가 받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상대가 받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난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싫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세상 모두에게 무관심하게 대하는 것은 아니다. 황금률은 좋은 뜻이지만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보상 받지 못한다.
“좋은 일의 보답은 늦거나 오지 않는다. 하지만 나쁜 일의 대가는 반드시 온다.” 나는 이 말을 믿는다. 내가 만약 황금률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여 세상을 이롭게 만들었다해서 세상이 나를 반드시 이롭게 만들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보상이 아예 없거나, 보상이 아직 없거나, 혹은 보상 받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각각 5% 55% 40% 정도라고 생각한다.
보상이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물며 내적 보상이라도 받을 수 있다. (물론 모든 일에는 아니겠지만.) 대부분 보상이 아직 없는 경우다. 이 경우엔 보상을 받을 만큼 충분하지 않거나, 보상이 오고 있는 중이다. 이건 마음가짐의 문제다. 언젠가는 보상 받을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사실 크게 어렵지 않다. 많은 종교인들은 내세에서 보상받을 거라 생각해 아무 대가 없이 선행을 베풀기도 한다.
문제는 3번, 보상 받을 만한 일이 아닌 경우다. 연구에 의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기여는 과장하고 상대의 기여는 축소한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 자신만 베풀고 있고, 자신만 배려한다고 느끼기 쉽다. 하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나도 위와 같이 생각한다.
- 죄수의 딜레마의 진짜 의미
죄수의 딜레만에서 정직하게 10년을 받으면 상대는 감옥에 가지 않는다. 글에선 이것이 정해진 답이라고 적혀있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 현실은 죄수 게임과 다르다. 실제 현실은 반복 시행 게임이다. 실제로는 10년을 복역한 나는 조직의 환대를 받고, 상대는 10년은 커녕 즉시 암살당해 죽을 것이다.
손익을 따져보더라도 도덕을 지키는 편이 좋다. 우선 진화생물학적으로 도덕이 존재하고 지금까지 일정한 형태로 유지되는 이유는 그것을 지키는 편이 세대와 시간을 초월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도덕은 사람들 간의 신뢰를 형성하고, 사회를 유지하며, 공정한 거래와 협상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가 도넛을 사러가다 칼빵 맞고 죽지 않는 건 도덕이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통용되지 않는 논리다? 그것은 틀렸다. 로버트 엑셀로드 교수가 실행한 전설적인 실험에선 컴퓨터를 통해 무수히 많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가장 성공했던 전략은 도덕을 지키는 쪽이었다. 당연히 융통성 없는 원론주의는 패망한다. 극단적인 건 언제나 옳지 못하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따져 보면 도덕의 승리다.
절대선을 추구하는 건 가장 어렵지만, 가장 이로운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