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관성 편향
나는 항상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하는 강박아닌 강박이 있다. 강박이라기 보단 고집이나 선호가 더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객관적으로 보고 싶다.”라는 이 한 문장에서 다양한 파급효과가 발생한다. 물론 나는 이런 성향 덕분에 어느정도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는 편이다. 그러나 그를 훨씬 상회하는 치명적인 단점을 불러온다. (물론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모두가 알다시피 개인은 절대 객관적인 시각을 가질 수 없다. 다만 조금이라도 다양한 시각으로 보고 싶은 욕심이다.)
나의 이런 [객관성 편향]은 대표적으로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첫째는 세상에 관하여, 둘째는 나에 관하여다.
세상에 관하여
나는 세상을 볼 때 최대한 편향과 편견, 자동적 사고의 오류 없이 냉철한 시각을 견지하고 싶다. 그래서 더 많이 알고, 적용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이러한 객관성이 나의 실행을 막는 큰 원인이 된다. 나 스스로 충분한 객관성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행동을 망설인다.
태생이 1m 앞만 볼 수 있는 개와 노력하면 100m 1000m까지 볼 수 있는 고양이가 있다. 1km 앞에 거대한 장애물이 있어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보인다. 1m만 볼 수 있는 개는 당장 발 아래 있는 길만 볼 수 있기에 일단 길을 따라 걷는다. 반면 고양이는 장애물이 있진 않은지 그 자리에서 시력을 초집중해 길의 끝을 확인해보려 한다. 얼핏 보기에 장애물이 있는 것 같다. 고양이는 출발도 하기 전에 이 길은 아닌 것 같아 포기한다. 길을 따라 걸은 개는 어느덧 장애물 앞에 섰다. 개는 장애물을 더듬거리며 난관을 해결하려 노력한다. 그러자 결코 넘을 수 없을 것 같던 장애물 옆 쪽에 아주 작게 구멍이 있는 걸 발견했고, 개는 구멍을 넘어 다시 길을 걸어간다.
내가 하고 있는 게 바로 고양이가 하는 짓이다. 해보지도 않고 멀리서 어렴풋이 보면서 포기하는 것. 그리고 나는 그걸 객관성이라 포장한다. 물론 그런 행동은 어느정도 객관적이다. 멀리서 보고 행동하기 전에 판단하는 게 옳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대부분 직접 가봐야 아는 것들이다. 결국 더 멀리 가는 건 1m만 보는 개일 것이다.
개는 한치 앞 밖에 못 보지만 일단 코를 들이밀고 걸음을 옮긴다. 반면 고양이는 고고한척 하며 자리에 누워 세상을 조롱한다. 개같이 살자. (물론 실제 개와 고양이의 시력이 어떤지는 모름)
나에 관하여
나는 나에 대해서 객관적인 판단을 하려고 애쓴다. 쉽게 말해 제 3자가 나를 봤을 때 어떤지에 대해 크게 신경쓴다는 뜻이다. 외모나 언행 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관념, 철학 등을 모두 포함해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내 스스로가 가진 모순으로 뒤덮여 숨을 허덕인다. 객관적인 시선은 나를 모순덩어리로 만든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한다면 그에 대한 반작용은 반드시 생긴다. 물질이 있으면 반드시 반물질이 생성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사람들은 내 생각을 결코 알 수 없지만 나는 알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반물질과 물질 사이의 괴리에 사로잡혀 고통받는다.
또, “객관적으로 보면 나는 이런 점이 못났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이런 게 부족하다.” 등등 나에게 엄격한 잣대를 내밀게 된다. 물론 객관적으로 내가 남들보다 잘난 점도 많겠지만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나에 대한 이런 입장은 마찬가지로 행동을 주저하게 만든다. 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 과외 공고를 올리고 연락도 왔었다. 하지만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누구를 가르칠 실력인가?’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러지 않은 것 같았다. 세상에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이런 객관적인 시각은 멍청해지는 것을 극히 꺼려하게 만든다. ‘내가 잘난 줄 알고 행동했다가 사실 아닌 걸 알았을 때 얼마나 멍청해질까. 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가 잘 안 됐을 때 얼마나 멍청해질까. 나 혼자만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꼴을 다른 사람이 보면 얼마나 멍청해보일까.’ 등등 그래서 나는 잘 즐기지 못한다. 나의 자아를 외부인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검열하기 때문이다. 웃고 즐기는 내 모습이 멍청해보인다.
그때 친구가 내 대가리를 깨부셨다. “그건 객관적인 게 아니라 비판적인 거 아니야?” 정말 그렇다. 객관성 편향을 갖는 것이 내가 객관적인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단지 “객관적으로 보고 싶어 한다.” 를 보여줄 뿐이다. 나는 전혀 객관적이지 못하다. 사실 사람들은 나의 능력을 인정해주고, 나의 부족함을 크게 느끼지 못한다. “현승씨(이, 님)는 뭘 해도 잘 할 것 같아요.”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이런 말에 넘어가서 기분 좋아하는 게 멍청해 보인다고 생각해서 빈말처럼 흘려보냈지만, 누군가 말처럼 “미래에 대한 칭찬은 하는 사람한테도 책임이 있기 때문에 쉽게 하는 말이 아니다.”가 옳다고 생각한다. 아니 애초에 그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말로 나에게 빈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개연성이 없지 않은가.
그날 나는 내가 자기비판이 심각할 정도로 강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릴 때는 약한 대인기피증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아서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항상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다녔다. 사람들은 나에게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고칠 수 있었지만 완전히 뿌리 뽑진 못해서 다시금 그 씨앗이 자라 이렇게 발화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길을 걷다 문득 “이런 식으로 생각하며 살다간 지금은 아니더라도 40, 50 쯤엔 정말 죽을 수도 있겠네.”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년인 사람들을 보며 무슨 낙으로 세상을 사는 건지 항상 의문이었었는데, 이런 상태로 중년이 되었다간 나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뿌리깊은 자기비판을 고치고, 나에게 관대하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