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힌 페이지 이론 (우연, 선택)
나는 독서를 할 때 언제나 책갈피를 사용한다. 책을 한 번에 다 읽기보단 띄엄띄엄 읽기 때문에 종이로 된 책갈피를 읽었던 부분에 꽂아두어 읽은 부분을 표시한다. 책을 읽을 때면 책갈피를 빼서 놓아두는데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미 읽은 앞 부분이나 한참 뒷 부분에 꽂아두었다가 책을 덮을 때 빼서 다시 읽은 부분에 꽂아둔다.
그날도 어김없이 책을 읽기 위해 책갈피를 뽑았다. 이미 300페이지 가까이 읽었기 때문에 뒷 부분은 자리가 없어 공간이 많은 앞 부분 아무데나 꽂았다. 책을 읽던 중 느낌이 이상해서 책의 앞 부분을 들쳐보니 한 페이지가 절반으로 접혀있었다. 아마 가방에 넣을 때 접힌 듯 했다. 나는 접힌 페이지를 펴기 위해 해당 부분을 펼쳤는데, 신기하게도 그곳에 책갈피가 꽂혀있었다. 나는 그 순간 접힌 페이지 이론을 생각했다.
나는 분명 책갈피를 아무 데나 꽂았다. 아니 적어도 그렇다고 믿었다. 그런데 책갈피는 접힌 페이지에 꽂혀 있었고, 그것은 100% 우연이라 할 수 없다. 그 페이지가 접혀있었기 때문에 해당 부분이 벌어져 있었을 것이고, 다른 부분보다 그 부분에 책갈피가 꽂힐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나는 책갈피를 무작위로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그 페이지가 접혀 있었기 때문에 그 곳에 꽂았던 것이다.
1부터 100페이지가 있을 때, 내가 책갈피를 꽂을 확률이 모든 페이지가 동일할까? 내가 58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았다면 이게 정말 동일한 확률로 정해진, 순전히 동일한 우연에 불과할까? 그렇지 않다. 중간에 있는 페이지들은 양 끝에 페이지보다 책갈피가 꽂힐 확률이 높을 것이다. 더군다나 만약 페이지가 접혀 있었다면? 안 접힌 페이지보다 높은 확률을 가질 것이다. 나는 여기서 두 가지 개념을 제시한다.
[우연 偶然]
우리는 종종 우연이라는 말을 오해한다. 우연이라 하면 무결하고 동일한 가능성을 떠올린다. 하지만 1%와 99%의 차이라도 이미 벌어진 일에 관해선 우연이라 믿곤 한다. 모든 사건들, 그러니까 가능성 혹은 우연들이 동일한 확률을 갖진 않는다. 인생은 수학 익힘책에 나오는 보따리에서 공 뽑기 게임과는 다르다. 어떤 공은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어떤 공은 집을 수밖에 없을 만큼 크다. 그렇다고 작은 공을 뽑는 게 불가능하진 않다. 다만 내가 큰 공을 뽑은 게 정말 동일한 확률에 의한 우연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물론 나는 예전에 밝힌 바와 같이 삶에 플롯이란 없으며 오직 인과를 가장한 우연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우연이 모두 동일한 가능성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노력하겠는가? 인과를 가장한 우연의 결과란 삶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삶은 빼앗았다가 도리어 나눌 상대를 준다거나, 내가 가는 길을 막고 대신 옆 길을 열어준다. 이것은 분명 인과로는 설명하기 힘든, 삶의 부당함, 신의 뜻, 즉 우연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연의 의미를 혼동해선 안 된다. 모든 게 우연이니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행동해선 안 된다. 삶은 다만 맥락일 뿐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인과로 보이지만 미래를 바라볼 땐 모두 맥락이다.
[선택 選擇]
나는 내가 책갈피를 꽂은 게 나의 순전한 나의 선택이었다고 믿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접힌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은 게 온전한 내 의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더욱이 내가 어느 페이지가 접혀있는지 확인하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내가 꽂은 부분의 페이지가 접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면? 나는 끝까지 이게 내 선택이었다고 믿을 것이다.
우리 삶에선 수많은 접힌 페이지들이 있다. 이것들이 의도된 것인지 혹은 의도없이 그리 된 것인지는 상황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이런 접힌 페이지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 어떤 페이지는 심하게 접혀있다. 그러니 모두가 동일한 페이지에 책갈피를 꽂으면서 살고 있다. 여기까지 봤다면 내가 걸어온 길이 순전히 내 선택이었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선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어차피 모두 접힌 페이지라면 내 선택이라는 게 의미가 없는게 아닌가? 그렇지 않다. 만약 내가 책갈피를 꽂기 전에 그 페이지가 접힌걸 미리 알았다면, 모든 페이지를 볼 수 있었다면, 난 그 부분에 책갈피를 꽂지 않을 선택을 할 수 있다. 내가 늘 말했던 것처럼 인생에선 가장 중요한 건 “선택”이며 선택은 앎을 통해 가능하다. 무지를 신봉하고 앎을 배척하는 일은 접힌 페이지에 맹목적으로 책갈피를 꽂게 만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많이 배우고,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내 페이지를 어디에 꽂을 지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