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욕망 이론
프랑스의 인문학자이자 불멸의 40인에 뽑힌 철학가 르네 지라르는 모방 이론을 주장했다. 그는 모든 욕망은 모방욕망이라고 설명한다. 이에 따르면 욕망은 자연발생적이지 않고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다. 너무 방대한 내용이기에 간단히 설명하면 인간은 욕망의 대상을 그 대상을 욕망하는 매개체를 욕망함으로써 욕망한다. 즉 [주체 →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 → 매개체 → 욕망의 대상]이 된다.
이로인해 자본주의에서 실가치가 아닌 욕망에 가치로 환산되어 가격이 책정되고, 사람들은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소비하고, 살아간다. 라캉 역시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했다. 아이는 사랑받고 싶기에 부모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그 욕망에 따라 살아간다. 마케팅 불변의 법칙에서도 유사한 말이 나온다. 사람들은 타인의 경험을 통해 소비를 결정한다. 그 물건을 써 본적 없지만 좋다고 느끼고, 남들이 좋다고 하니까 진짜로 좋은 것처럼 느끼는 이유다.
다시 지라르의 이론으로 돌아오면 주체는 매개체를 넘을 수 없는 초월자로 인식하거나, 넘을 수 있는 경쟁자로 인식한다. 매개체와 경쟁을 통해 사회는 차이가 소멸되고 동질화된다. 이러한 무한한 경쟁 속에서 갈등이 발생하고 이미 동질화된 사회에선 희생양을 만든다. 이 희생양은 그들의 동질성을 벗어난 (혹은 그렇다고 믿어지는) 무엇이다. 사회는 이렇게 끝없는 모방 경쟁에서 희생양을 만들어내며 유지된다.
분명 욕망은 인간 행동의 아주 깊숙한 동인 중 하나다. 욕망은 모든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이긴 하다. 나는 인간 행동을 본능과 의지로 나눴다. 본능은 내재된, 수동적인 것, 의지는 능동적인 것이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행동은 본능에 의한 것이다. 본능은 다시 자아적 본능과 생물적 본능으로 나뉜다. 생물적 본능은 생존과 번식이다. 자아적 본능이란 자아를 완성시키고자 하는 욕구다. 인간의 생존은 끊임없이 위협받고, 인간의 자아는 언제나 불완전하다. 인간의 매커니즘은 이를 채우기 위해 작동한다.
본능과 의지는 상호독립적인 것은 아니며 자아적 본능과 생물적 본능 또한 마찬가지다. (이는 인간을 설명하는 단 하나의 이론은 없다라는 생각에서 기인했다.)
최초의 욕망은 생존, 즉 부모의 사랑과 인정, 소속감 등에서 발생한다. 하지만 아이는 성장하면서 부모로부터 독립된 자신의 자아를 찾고자 한다. 자아관이 형성되고 자신의 미완의 자아를 마주했기 때문이다. 자아를 마주하는 과정이 결여된 사람들은 평생 생물적 본능에 의해 지배된다. 욕망은 생물적 본능에서 자아적 본능으로 전이된다. 여기서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기 위한 욕망이 시작된다.
하지만 인간은 모르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이 모르는 걸 욕망할 수 없다. 그 욕망이라는 것도 결국 경험에 의존한다. 이때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나체로 마주하지 못한다. 지라르는 모방을 통해 욕망한다고 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은 이미지를 욕망한다. 인간은 상대적 절대성을 갖는다. 개체는 그 스스로 절대성을 갖는다. 오로지 그 만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게 인식에서 비롯하며 불충분한 정보는 실재가 아닌 인식된 가상의 이미지를 인지한다.
아이패드가 갖고 싶은 건 아이패드의 실재가 아니라 아이패드의 이미지를 갖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사람, 사물, 현상, 미래 등 모든 것에 적용된다. [주체 → 이미지 → 욕망]이다. 욕망은 이미지로 포장되어 있어 왜곡되고 곡해된다. 따라서 실재 욕망에 다가가기 보단 그 이미지를 소유하려 노력한다. 실재 욕망이 아닌 이미지의 욕망을 욕망하기 때문이다.
실재 욕망은 생물적 본능과 자아적 본능, 그 어딘가에 있다. 하지만 욕망을 의지로 해석하거나 욕망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끝없는 욕망의 늪에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채 허덕인다.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 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기 위해선 실재 욕망과 이미지 사이의 괴리를 자각해야 한다. 내가 바라고 있던 것이 허상이며 실재 욕망에 다가가기 위해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자신의 민낯을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 진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이는 굉장히 고통스럽고, 어렵다. 예를들어 누군가는 스스로가 여자친구를 사랑하는 로맨티스트라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냥 섹스가 하고 싶었을 수 있다.
사회는 위선과 허위 그리고 이상주의를 주입한다. 그리고는 마치 섹스를 하고 싶은 건 저급하다는 듯이 말한다. 그렇게 형성된 이미지는 실제 나의 욕망과는 동떨어져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라는 것이 그리 달콤하게 포장되지 않았으며 동물과 인간을 구분하는 그 [본능]이라는 이미지가 부정적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인간은 진실되지 못한다. 사회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진실된 삶에서 멀어지게 하는 원인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에 대한 주입된 잣대가 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이분법적 잣대에서 오는 도덕적 죄책감과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이미지를 떨쳐내기란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세상엔 위선자와 이상주의자들이 넘쳐난다. 이동진 평론가는 가장 경계하는 태도가 원론주의라 했다. 아무리 좋은 사상도 타협을 거부하는 순간 탈레반이 된다.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선 반대자가 필수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선, 반대는 악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