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mart Rabb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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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 되는 법을 알려드립니다.

작성 2022.06.23분류 글주제 인간과 삶

세계 4대 성인 공자, 부처, 소크라테스, 예수의 공통점이 무엇일까? 인류 역사상 현명한 지도자, 구도자, 철학자, 사상가는 넘치도록 많다. 하지만 왜 이 4명이 세계 4대 성인으로 추앙받고 존경받는 것일까? 일단 인간은 세계 ~대 ~ 와 같이 타이틀을 붙이거나 순위를 붙이는 행위를 즐긴다는 것 등의 문제를 차치하고 생각해보면, 바로 “행”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사랑을 설파하며 사랑을 실천했다. 소크라테스는 삶과 죽음, 무지에 대해 논하며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부처는 열반을 말하면서 실제로 번뇌에서 벗어난 삶을 살았다. 공자는..음.. 아무튼 행했을 것이다.

말은 누구나 한다. 하지만 군자는 행동하는 사람이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행동한 것을 말한다. 세상의 현명한 말을 남긴 사람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현명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브라만들은 모두 어디있는가? 행동하는 사람은 어디있는가?

아기돼지 삼형제를 보고 벽돌로 집을 지어야겠다는 것을 깨닫고, 생각하고, 말하기는 매우 쉽다. 하지만 정말 극소수의 사람만이 벽돌로 집을 짓는다. 현대사회에선 특히 더 심하다. 우리는 아기돼지 삼형제, 양치기 소년, 여우와 신포도, 벌거벗은 임금님 등등등 읽고 배우고 느낄 게 너무나 많다. 이중에 하나만 행하기도 어려운데 이 모든 걸 행해야 한다.

다독은 군자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군자는 다독을 했지만 다독을 했다고 군자가 되진 않는다. 책을 읽는다 하여 모두 같은 경지에 도달할까? 그렇다면 다독이 성숙함의 조건이 됐을 것이다. 세계 4대 성인은 세상에서 책을 가장 많이 읽은 4명이 차지할 것이다. 네이버 블로그만 봐도 다독자들이 정말 많다. 어떤 이는 이틀에 한 권 꼴로 책을 읽는다. 수천권의 서평을 남긴 사람들도 있다. 이들을 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독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읽은 책의 권수가 그 사람의 성숙도나 현명함의 수치를 증명하는 지표는 아니라는 것이다.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읽지 않은 사람보다 성숙하고 현명할 확률이 높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진 않는 다는 것을 느꼈다.

“현명함과 성숙함은 수치로 표현할 수 없다.”, “우열을 가리는 게 무의미하다.” 등등 이런 말은 안 통한다. 분명 어떤 이는 다른 이보다 탁월하고, 어떤 생각은 다른 생각보다 훌륭하다. 이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허무맹랑한 이상주의자거나 공산주의자다.

10권을 읽어도 100을 깨닫는 사람과 1000권을 읽고 100을 깨닫는 사람. 결국 똑같이 100을 깨달았다. 단지 1000권을 읽었다는 이유로 10권 읽은 사람보다 현명할까? 내가 보기엔 둘 다 똑같다. 차이는 누가 더 많이 행했는 가, 누가 깨달음을 삶에서 실천했는가에서 발생한다.


정리해보자면 여기서 두가지 큰 틀이 있다.

  1. 독서량에 대한 문제
  2. 행동에 대한 문제

먼저 독서량에 대한 문제는 왜 누군가는 더 많이 읽는데 덜 깨닫고, 누군가는 더 적게 있는데 더 깨달을까이다. 나는 이게 수용력이 아니라 생산력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수용과 생산 중 지식의 형성은 생산단계에서 발생한다. 책을 읽고 내 생각을 생산해내는 능력에서의 근본적인 차이가 깨달음의 차이로 이어진다. 즉 받아들이는 것의 차이라기 보단 발산할 수 있는 생각의 한계가 다르기에 느끼는게 다르다고 보여진다.

또 하나는 생산 원천의 차이다. 외부와 내부로 나뉘는데 생산 원천이 외부에서 주어지는냐 내부에서 만들어내느냐다. 외부인 사람은 끊임없이 연료가 들어와줘야 하므로 많은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부인 사람은 외부 자극이 중요한게 아니다. 바로 개똥을 보고도 인생을 깨닫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사상의 증폭기를 가진 사람이다.

난 이게 어릴 적 만들어지는 차이인지, 아니면 타고난 자질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유전적 영향이 지대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측해보지만 출생 후 환경, 교육, 주변사람 등의 영향도 적진 않을 듯 싶다.

다음으로 행동에 대한 문제다. 나는 삶은 진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밍웨이가 말했다. 문학은 진실되어야 한다고. 과연 다른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군자는 행한 것을 말한다. 삶이 예술을 선행한다. 말은 누구나 하지만 행동은 아무나 하지 못한다.” 등등이 진실됨을 부연설명하는 문장이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그의 주변사람들을 칭찬하는 글을 썼다, 그 중 한 인물에 대해 “그는 지나친 도덕적 연설을 하지 않았다.”라 표현했다. 자기도 지키지 못 할 도덕적 연설을 우리는 너무 자주 말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좋은 말, 옳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행동하기가 어렵다. 내 삶에 진실되기가 힘들다.

그래서 내가 생각한 방법은 말을 안하는 것이다. 나도 행동하지 못할거면 말이라도 하지 말자. 그리고 조금씩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에는 말해주기와 보여주기의 서술법이 있다. 모두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말한다. 소설가는 말해주는 게 아니라 보여줘야 한다고. 라스콜니코프가 화났음을 쓰려면 그가 화났다고 말하는게 아니라 화난 사람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어라.

말을 안한다는 내 방법이 찐따같고, 겁쟁이같고, 멍청하다 생각하는가? 그러면 도대체 이 보단 현명한 어떤 다른 방법이 있는 걸까? 행동은 즉각적으로 바뀔 수 없다. 하지만 말을 안하는건 지금 당장도 할 수 있다. 말보다 행동이라는 말은 믿으면서 행동하지 못 할 거면 말하지 말라는 말에는 왜 동의할 수 없는가? 결국 조삼모사인걸..

마치 레벨에 따라 쓸 수 있는 스킬이 정해진 스킬창처럼 내 행동을 레벨업시켜 스킬의 장금을 해제하고 싶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걸 행하는 단계에 갔을 땐 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하지 않는 것을 행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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