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성 문제 2
본질과 실체, 표상의 차이는 극명하기도 애매모호하기도 하다. 간단한 예시를 들어보겠다. 앞선 글에서 강물의 대한 논의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흐르는 강물에 들어갔다 나온 후 바로 다시 강물에 들어갔다. 여기서 두 개의 사건이 생긴다. 첫번째 강물과 두번째 강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첫번째 강물은 이미 흘러가고 없으며 첫번째 강물과 두번째 강물은 다른 것이라 말한다. 즉, 연속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연속적인 것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나 역시 모든 것은 변한다는 입장이다. 그 무엇도 동일하지 않다. 동일한 것은 없다. 본질-실체-표상 모두가 변한다. 하지만 본질과 표상은 연속성을 갖는다. 즉 본질과 표상으로만 이루어진 세계에서 괄목할 만한 변화가 없는 상태는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내 세계관엔 실체가 있다. 본질, 표상이 동일해도 실체가 끊임없이 변하기에 동일성은 성립될 수 없다.
기본 전제
- 기본적으로 모든 것은 변할 수 있다. (본질, 실체, 표상)
- 본질과 표상은 일정 수준의 동일성을 갖는다. (어느 시점에선 동일하다 볼 수 있다.)
- 그러나 실체는 끊임없이 변한다. (한 순간도 동일하지 않다.)
- 본질-실체-표상으로 이루어진 사물에서 본질 표상이 같아도 실체가 다르기에 동일성은 없다.
-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은 유동적인 존재라는 점이다.
표상과 본질의 차이는 쉽게 이해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내 눈으로 보는 강물은 표상이다. 1초 전 강물이나 지금 보는 강물이나 똑같은 강물로 보인다. 한강은 계속 흐르고 있긴 하나 여전히 한강이라 불린다. 표상은 표층이라 했다. 우리가 집을 짓고 사는 이 땅이 표상이다. 만약 한강에 색소를 타서 한강물이 전부 빨간색으로 변했다고 가정해보자. 사람들은 더이상 한강을 한강이라 부르지 않고 “피의 강”이라 부른다. 한강이라는 표상은 사라진지 오래다. 표상은 변했다. 사람들은 더이상 한강이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하지만 과연 한강 혹은 피의 강의 본질은 변했는가? 한강은 우리가 한강이라 부르기 전에도 강이었다. 피의 강이든 한강이든 그 이미지가 무엇이든 강은 그대로 강이다. 하지만 본질도 변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한강이 있던 자리에 산이 생겼다. 더이상 강의 본질은 없다. 강의 본질은 산의 본질이 되었고, 산의 표상이 생겼다.
한강에 색소를 풀지 않고, 지각변동이 일어나 강이 산이 되지 않는 한 이는 동일한 강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세계는 그런식으로 해석되어 왔다. 세상을 규정하고, 이론을 정립하고,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선 동일성이 필요하다. 아무것도 동일하지 않다면 어떤 것도 정의할 수 없게 된다. 멘틀이 끊임없이 흐른다고 우리가 집을 못 짓고 살지는 않다. 우리는 단단한 땅위에 집을 짓는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동일하다고 보지 않는 것이다. 본질과 표상 사이엔 실체가 있다. 실체라는 개념은 동일성을 거부하기 위해 내가 만든 개념이다. 프로이트의 의식, 무의식, 리비도를 이야기 하였는데, 그 개념이 눈으로 보이고, 실제 현상이고, 관측하고 실험할 수 있는 대상인가? 프로이트가 고안한 개념일 뿐이다. 만약에 다른 학자가 리비도를 순두부찌개라 명명했으면 순두부찌개가 됐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믿지 않거나, 반박하는 학자들도 굉장히 많다. 내 설명이 프로이트의 글만큼 설득력 있거나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철학이라는 것은 어둠속에서 도예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본질과 표상만으로 충분히 세상을 설명가능하고 많은 철학자들도 그래왔다. 나도 이 두개의 필요성을 인식하기에 포기하지 않고 여기에 실체를 더한 것이다. 실체는 “지금”을 상정하는 말이다. “지금”은 시간을 초월하는 개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는가? 내 감각은 지금보다 느리다. 내가 보는 것은 과거의 빛이 사물에 반사되어 눈에 들어와 시신경을 타고 뇌가 인식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지금만 살 수 있지만 결코 지금을 감각할 수 없다. 우리는 3차원 세계에 살지만 실제로는 2.5차원을 감각한다고 한다. 3차원에 살지만 3차원을 느낄 수 없다.
내가 실체를 설정한 것도 “지금”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나에겐 지금이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오로지 지금에만 살 수 있다. 과거의 나, 미래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과거의 나를 느낄 수 있는가? 그건 지금의 나가 생각하는 과거의 나다. 미래의 나를 느낄 수 있는가? 그건 지금의 나가 기대하는 미래의 나다. 인간은 오로지 지금에만 존재하며 “나”는 연속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뚝뚝 끊어져 지금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양자역학에서 연속성을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이렇게 해석했다. 이전에는 원자들이 일정한 궤도를 타고 연속적으로 핵을 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양자역학이후 무작위로 산재되어 있는 구름을 관측하는 순간 대상이 포착된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는 연속성이 허구라는 것을 밝혔다고 생각한다.
한강물을 손으로 퍼서 다시 강물에다 넣었다. 1초후 다시 강물을 펐다. 내가 픈 강물이 정녕 동일한 강물인가? 처음에 퍼낸 강물은 이미 흘러가고 없다. 나는 똑같은 강물을 펐지만 그 강물은 분명 동일하다고 말할수 없다. 이것이 실체다. 1초는 예시이다. 0.00000001초후에 펐어도 이는 다르다. 왜냐면 지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은 시간을 초월한다. 지금은 셀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인간도 동일하다. 이현승의 본질과 표상은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엔 똑같아 보인다. 내 외모는 나를 아는 누가 봐도 이전의 나와 똑같다. 조금씩 늙어가지만 일정한 연속성을 지니기에 동일하다고 인식가능하다. 내 외모가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외모 이면에 이현승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본질이 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꾸준히 변해왔다. 해사를 나오기 전에 나와 나온 후에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큰 변화를 겪었다. 하지만 해사를 나오고 4개월간은 크게 변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 실체는 꾸준히, 끊임없이 변해왔다. 여기엔 오로지 지금의 나만 존재하기 때문에 나는 그 무엇과도 동일하지 않다. 실체는 내 외모가 어떻고, 습관이 무엇이고, 내 생각이 어떻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와 무관하다. ‘지금의 나’만 존재 가능하다는 것이 실체의 핵심이다. 지금의 내가 무한히 생성되는 것이 아니라 멘틀처럼 유동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멘틀이 흐르면서 그 모양을 달리할 것이다. 지금의 멘틀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