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소망, 사랑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이 있을 것인데 그 중 사랑이 제일이니라 - 고린도전서 13.13.
이 이야기를 슬빈이가 동의하지 않을 걸 안다. 아니 어찌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핵심가치로 내건 기독교가 실은 가장 많은 인간을 학살한 종교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말하는 사랑은 허무맹랑하고, 모순적이고, 바보같다.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분명 옳은 말이다. 지나치게 옳은 말이다. 너무 교과서스러운 대답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현가능성이 없고, 멍청한 소리로 들린다. 나도 알고있다.
왼 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대라니. 이 얼마나 바보같은 짓인가. 스스로가 노예가 되는 걸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말처럼 들린다. 어느순간 내가 왜 사랑을 추구하게 됐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 때는 이유가 있었는데, 이젠 이유같은건 없다.” 무언가 깨달았다. 이유가 중요한게 아니구나. 이유같은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 이유에 대한 집착이 나를 멈추게 만든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것에 이유를 붙이고 의미를 찾으려한다. 그 집착이 우리를 병들게 하는지도 모르고. 사실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의미에 대한 집착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는 서머싯 몸의 말을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것 같다.
사람은 이유가 없는 붕 뜬 상태를 버티기 힘들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든 이유를 찾아서 붙이려 하고, 이유를 못 찾겠다면 포기한다. 이유라는건 원래 그 행위에 종속된 것이 아닌 임의로 설정한 것일 뿐이다. 사랑엔 이유가 없다. 모든 행위의 이유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행위의 이유는 없어진다. 사랑하니까 하는 것이다. 내가 왜 글을 쓰지? 글쓰기를 사랑하니까. 내가 왜 너를 만나지? 너를 사랑하니까. 내가 왜 살아야하지? 삶을 사랑하니까. 아주 단순하고 명쾌한 이유다. “이유는 없다.”
삶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말은 좀 처럼 와닿지 않는다. 우리에겐 이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사랑이라는 이유를 붙였다. 사실 같은 말이다. 이유는 없다. = 사랑이 이유다.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써 글의 두서가 없어졌다. 사실 오늘 쓰려했던 말은 이게 아닌데, 글을 쓰다보니 무언가를 깨달아서 물흐르듯이 글을 쓴다. 글을 쓰는 것이 즐겁다. 오로지 그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다. 글을 사랑한다.)
아무튼 오늘 쓰려했던 건 소망에 대해서다. 믿음과 사랑은 알겠다. 믿음은 말 그대로 믿음이다. 조건이 없는 믿음. 나는 신을 믿는다. 개개인은 모두 신이다. 나는 나를 믿는다. 나는 너를 믿는다. 믿음은 다른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냥 믿는 것이다. 사랑은 역시 말할 필요도 없다. 사랑은 사랑이다. 사랑엔 이유가 없다. 사랑하기에 사랑한다. 사랑을 표현하는 여러 수식어구가 있지만 구태여 늘어놓지 않을 것이다. 사랑에 대해선 이미 많이 말했다. 믿음과 사랑은 이미 머릿속에 그 형태가 명확하다.
그런데 소망은 뭐지? 소망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을 바람”이다. 무엇을 바란다는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소망해야 하지? 순항훈련 때 만난 목사님께 연락드렸다.
“오! ㅋㅋㅋㅋ 오랜만입니다. 그렇찮아도 소식 궁금했습니다. 연락 고맙네요 :) 잘 지내요? ㅎㅎ 군대 가기전 이 시간들이 꽤 여유롭고 행복하기를 기도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요하다는데 참 모호하죠.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무엇을 희망해야하는지. 또 사랑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13장은 12-14장의 맥락에서 함께 읽어야합니다. 12장부터 바울은 은사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어요. 고린도는 영적으로 굉장히 고조된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도시였고 그런 분위기가 교회 내에서도 성행했던것 같아요. 교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더욱 더 신묘한 힘과 능력을 원했지요. 방언이라든가 예언이라든가 치유하는 힘이라든가 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은사는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 되게하는 것이며, 그 무엇보다 영원하다고 바울은 이야기하지요. 사랑은 흔적을 남기니까요.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천국에 대한 소망과 경배라기 보다는 교인들끼리 과시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서로를 믿으며, 서로를 포기하지 않으며, 서로를 끝내 사랑하는 것을 바울은 이야기하는 겁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를 믿고, 하나님의 가능성이 담긴 서로에 대한 희망을 거두지 않으며, 서로를 사랑하고 배려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의 이러한 결의는 영원한 흔적을 남길 것이다.
이해가 됐을까요?”
사도 바울은 철저한 바리새인이자 엄격한 율법학자였다. 즉, 예수와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선 선봉장이었다. 그런 그가 예수를 만나 감화되고 그를 믿게되어 사랑을 전파했다. 어떤 이들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핑계로 자기 이웃을 욕하고, 그들의 고통을 무시하였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바울이 하는 말은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성경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한 아이가 물에 빠졌으나 안식일에는 일해선 안된다는 교리때문에 아무도 그를 구하지 않고 있었다. 예수가 그를 보고 당장 아이를 구하라 명했고, 사람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타박했다. 그러자 예수는 무엇이 진정으로 중요한지 모르는 이들을 꾸짖었다.
서로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소망이다. 상대방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 기대하는 것. 상대방이 사랑을 믿을 것임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소망이다. 그간 비워져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진 기분이다. 나의 사랑은 불완전했지만 이로소 한층더 완전해 지고 있다. 나는 소망에 대해 배웠다. 나는 소망하기를 두려워했다. 그로인해 상처받을 내가 무서웠다. 하지만 소망없인 믿음과 사랑도 부질없음을 몰랐다. 소망하지 않고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건 틀렸다. 진정한 사랑이라면 소망하기를 멈춰선 안된다. 애초에 나는 기대를 안한다는 명목으로 시작하기도 전부터 포기하고 있었다. 그게 옳다고 여겼지만 사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망가는 것에 불과했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
사랑에 대해 하나 둘 씩 배워가고 있다. 내 삶의 행동지침이 점점 완성되어가고 있다.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음을 배웠다. 왼 뺨을 맞으면 오른뺨을 대라는 정신에 더욱 가까워졌다. 때로는 상처받고, 서운하고, 좌절하겠지만 그럼에도 손을 내밀고 상대가 내 손을 잡아줄 것이란 소망을 포기하지 않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