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째 살인 (4)
나는 물방울의 조언을 들었다. 그 녀석이 돌아올 때까지 침대와 마주보고 있는 책상 밑에 숨었다. 그 녀석은 왠일인지 오늘따라 유독 지쳐보였다. 나에겐 더없이 큰 행운이다. 큰 노력없이 녀석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녀석은 씻지도 않고 그대로 침대에 쓰러졌다. 마치 그게 자기 침대인양. ‘더러운 녀석..’ 나는 그 녀석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녀석이 잠드는 것은 그의 목을 꺾어 정의로운 응징을 선사한 것과 동일하게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 녀석은 요상한 신음소리를 내며 침대를 뒹굴었다. 목이 부러진 모양이다. 갓잡은 생선처럼 팔딱거리며 죽어가는 녀석을 보니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내가 해냈다. 녀석을 죽였다. 그것도 아주 손쉽게. 내게 재능이 있음을 깨달았다.
첫 살인 이후에도 다이나믹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길가에 쓰레기하나 줍는다고해도 세상은 늘 어제와 똑같이 더럽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쓰레기를 버린 이를 죽이는 것이다. 그는 그가 평생 버릴 쓰레기들과 함께 매장될 것이다. 첫 살인의 흔적을 어떻게 처리했는 지는 이제 가물가물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갔던 것 같다. 심각한 불면증과 스트레스로 정신착란 증세를 보였다. 말하는 물방울이라니. 사람들에게 나는 틀림없는 정신병자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종종 싱크대에 귀를 기울이곤 한다. 혹여나 물방울이 내게 말을 걸지는 않을까 싶어서다. 지금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린다면 난 미치지 않았을 거니까. 난 지금 미치지 않았다. 아주 냉철하고 또렷하다. 나는 물방울 만큼이나 현명하다. 고개를 돌려 싱크대를 봤다. 어제 놔둔 간장계란밥이 찐득한 노란색 빛깔을 유지한채 그대로 누워있다. 스테인리스 싱크대엔 물방울이 여럿 있긴 하지만 모두 조용하다. 역시 미쳤던 걸까. 기록적인 첫 살인은 이제 먼 추억으로 남았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K다. 그제서야 오늘 그와 만나기로 했다는 게 기억났다. 도무지 말이 안나올 것 같아 연결을 거부한 뒤 그에게 문자로 일이 생겨 약속을 취소해야겠다고 보냈다. 그는 실망하겠지만 머리를 두고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K는 내 몇 없는 친구다. 생각해보니 내가 친구라는 걸 만든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아직 살인에 대한 죄의식이 내 말문을 막았을 무렵 나는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점심 종이 울리기 전에는 난 죽어있었다. 녀석의 저주였을까? 목이 꺽여 아무 말도 못한 채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녀석이 떠올라 해가 12시로 가기전에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당연히 남들에게 왜 내가 말을 못하는지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나는 외톨이가 되길 자처했다.
홀로 지내는 건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원채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던데다, 목 꺽인 유령의 저주로 인해 막힌 말문을 억지로 열려는 노력이 오히려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니 차라리 아무하고 대화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마음 편했다. 녀석을 죽인 뒤로 달라진 나였지만 좋은 방향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옳음으로 가는 길도 옳은 것일까? 사실 그때까지도 내가 다시 손에 피를 묻히리라곤 예상하지 못 했다. 두번째 살인은 K를 만나고 난 후이다. 대학에서 만난 K는 실로 처음 접해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독특한 회색눈을 가졌다. 아주 멀리서도 그 잿빛을 보면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낮은 채도를 띄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있으면 그 속에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한다. 그의 눈은 회색이지만 그가 보는 세상은 더 없이 다채로운 듯했다. 눈동자에 써야할 색까지 그의 시신경으로 쓰여져 오히려 그 색을 잃었던 것일까. 그의 눈은 가장 칙칙했지만 그가 보는 것은 가장 화려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새 그와 나는 친구가 됐다. 유독 크고 검은 동공을 가진 나와 회색눈을 가진 그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