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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

작성 2022.05.27분류 글주제 예술과 철학

어떻게/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

이 물음의 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질문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해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이 정의한 질문은 “알고자 하는 바를 얻기 위해 물음.”이다. 알고자 묻는 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것을 안다는 상태로 바꾸기 위해 물음을 던진다는 뜻이다. 즉, 물음을 던지기 위해선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구분하는 것이 우선이다. 내가 모르는 것은 무엇인가?

“안다는 것은 아는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모르는 상태를 ‘무지’라고 한다면 그 반대는 단연 ‘앎’이다. 무지를 ‘알고 싶다면’ 반대로 앎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어떻게/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란 질문은 자연스레 앎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내가 생각하는 앎이란 지식을 소유했는가이다. 여기서 지식엔 두 종류가 있다. 설명할 수 없는 지식과 설명할 수 있는 지식. 즉, 안다고 생각하는 지식과 실제로 알고있는 지식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 중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은 무엇일까?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란 그 존재 자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내재화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을 마음속에서 시각화 할 수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서 다시 두개로 나뉜다.

  1. 그 존재자체의 본질을 이해하고 내재화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개념을 마음속에서 시각화할 수 있느냐
  2.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느냐

따라서 나는 지식 (설명할 수 있는)을 두개의 중요한 핵심으로 나눴다.

  1. 존재론적 이해
  2. 표현가능성

첫번째 관문

존재를 이해하느냐는 물질 너머에 있는 그 존재의 본질을 보고 떠다니는 형이상학적 구름을 다시 물질적인 것으로 변환할 수 있는가이다. 우리의 모든 지각활동은 ‘형태’를 지각하는 것이다. 인간의 불가역적인 육체적 한계로 형태이외에 것을 지각할 수 없다. 빨간색이 무엇이냐를 생각할 때 빨간 크레파스의 그 빨강말고 빨강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미를 지각할 수 있는가? 그것이 색이든, 냄새든, 데이터이든 우리는 형태이외에 것을 지각할 수 없다. 하지만 형태에 내재된 의미를 ‘인식’할 수는 있다. 빨강을 떠올리면 정열이 색, 사랑의 색 등 어떤 형태가 없는 추상적인 관념들이 떠오른다. 이는 빨강의 의미를 인식한 것이다.

(형태와 의미가 일원적인지, 이원적인지, 의미의 절대성과 상대성 등에 대한 논의는 차후에 할 예정이다.)

따라서 ‘물질 너머에 있는 그 존재의 본질을 보고 떠다니는 형이상학적 구름을 다시 물질적인 것으로 변환할 수 있는가”는 형태를 지각하고 의미를 인식할 수 있는가로 귀결된다. 이 부분은 매우 고난이도의 작업이다. 형태에서 의미를 추출할 수 있는 능력은 쉽게 갖춰지지 않는다. (나는 이를 연습하기 위하여 존재적 지각이라는 나만의 ‘지각의 틀’을 설정했다.)

두번째 관문

첫번째 관문을 어찌저찌 넘어도 대부분 이 관문을 넘지 못한다. 의미는 표현되어야 실체적 가치를 지닌다. 아무리 대단한 생각이고 아이디어도 표현되지 않으면 무용하다. 설명이라는 것은 타인을 상정한 것이다.(자기 자신도 타인이라 볼 수 있다.) 타인에게 내 머릿속에 있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설명인데, 앞서 얘기 했듯 우리는 형태를 통해서만 지각가능하다. 표현한다는 것은 형태에서 추출한 의미를 다시 형태로 옮겨담는 작업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효과적인 표현은 두가지다. 바로 말과 글이다. 내가 해석한 의미를 말과 글이라는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가에서 설명할 수 있는 지식과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이 갈린다.

나는 이 두가지 관문을 통과한 지식이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라 정의하였고, 오로지 설명할 수 있는 지식만 나의 완전한 지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의대로라면 사실 거의 대부분의 것들은 내가 모르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나는 아직 어떤 것에서도 존재적 의미를 추출해 형태로 옮겨담지 못했다. 나는 어떤 것의 현상, 사물, 개념에서도 첫번째 관문을 넘지 못했다.

“내가 알고있는 유일한 사실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다.” - 소크라테스

앎은 앎이고, 무지는 무지다. 공자의 말이 이해가 간다. 나는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질문해야하는 가를 위해 앎과 무지에 대해 성찰했다. 이 논의의 중점은 나의 무지에 대한 설명이다. 나는 나의 무지를 충분히 설명했다고 믿는다. 이제 적어도 나는 ‘모른다는 것’을 안다.

어떻게 질문해야 하는가는 먼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무엇을 질문해야 하는가는 ‘나는 아무것도 모르므로 모든 것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한다.’로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대로라면 아무리 질문해도 나는 절대적인 앎에 도달할 수 없다는 함정에 빠진다. 하지만 이것은 착각이다. 알게되면 더이상 알 수 없다.이것을 나는 “종착지의 역설”이라 부른다. 작년여름 나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국토대장정을 떠났다. 부산에 도착하고 나서 깨달은 사실은 더이상 국토대장정은 없다는 것이다. 종착지에 도착하면 더이상 종착지라는 건 사라지고 더 이상 종착지에 도달할 수 없다. 국토대장정은 도착한 순간이 아니라 도착하기 전까지 수많은 도로 위에 있었다. 인생의 끝, 죽음에 도달해서는 더 이상 인생이란 없다. 인생은 그 과정에 있다. 앎이라는 것도 그렇다. 앎의 추구가 곧 앎이다. 나는 앎을 추구하기 위해 질문을 던지고 내 스스로 답을 정의할 것이다.

앎과 무지에 대한 철학적 담론은 이미 여러 위대한 철학자들에 의해 수차례 진행되었고 그것에 대해 나는 무지하다. 이 글을 쓰는 목적은 교과서를 편찬하려거나, 대단한 논문을 발표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스스로에게 설명하기 위해 글을 쓴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는 다루는 내용은 그것들과 무관하며, 나는 내 나름대로의 답을 내기위해 글을 쓴다. 나의 세계관을 구축할 수 있는 답을 구하려 하는 것이지 초월적인 진리를 찾고자 함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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