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와 나무
구름과 대지가 만나는 곳, 완만한 곡선이 시선을 따라 차분하게 흐드러지는 그 변곡점에는 한 그루 나무가 있었다. 언덕 위 나무는 그늘이 빚지는 유일한 존재였다. 그 일대에는 다른 어떤 식물도 없어 나무는 홀로 서 있었다. 나무가 처음부터 넓은 둘레를 가진 건 아니었다. 위태로운 가지에서 시작해 지금이 되기까지 때로는 태풍이 불었고, 때로는 해충들이 그 속을 갉아먹었다. 나무는 홀로 언덕위에 있었다. 나무는 자신이 왜 그곳에 심어졌는지 알지 못했다. 나무는 자신을 이곳에 외로이 싹트게한 이를 원망했고, 땅을 질투하고, 하늘을 시기했다. 나무는 자신을 푸르게 만든 태양과 갈증을 달래준 비를 이해하지 못했다.
유난히 해가 길던 어느 날 소녀가 찾아왔다. 무더운 날씨에 지친 소녀는 유일한 그늘인 나무 아래서 휴식을 취했다. 소녀는 나무에게 입 맞추며 고마움을 전했다. 유난히 바람이 거세던 어느 날 소녀가 다시 찾아왔다. 쏟아지는 비에 젖은 소녀는 유일한 가림막인 나무 아래서 비를 피했다. 소녀는 나무를 안아주며 나무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소녀는 나무의 유일한 친구가 됐고, 나무는 기꺼이 소녀의 위로가 되었다.
나무는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됐다. 언덕 위 유일한 그늘이자 가림막인 나무는 소녀를 만나 자신의 쓰임을 느꼈다. 그 후로 나무는 늘 소녀를 기다렸다. 때로는 단 과일을 맺어 소녀의 허기를 달래주고, 떄로는 자신의 팔을 잘라 별 빛에 소녀가 젖지 않도록 감싸줬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소녀를 위해 스스로를 불태우기도 했다. 소녀가 오지 않는 날에는 나무는 시름시름 앓았다. 소녀는 나무의 모든 것이 되었다. 나무는 소녀가 없이는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나무는 하염없이 소녀만 기다렸다.
시간은 낙엽이 떨어지는 속도보다 빨랐다. 소녀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게 되었다. 소녀는 대학에 입학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평생을 약속했다. 나무는 소녀의 꺼내보지 않을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조각으로 남았다. 소녀는 나무를 잊었지만 나무는 늘 소녀를 느꼈다. 나무는 알 수 있었다. 소녀는 울고 있다. 소녀에게는 나무가 필요했다. 하지만 소녀는 더 이상 나무를 찾아오지 않았다. 나무는 애가 탔다. 나무는 소녀가 슬플 때 늘 들려줬던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를 생각했다. 그녀에게 그 소리를 들려줘야만 했다.
나무는 젖 먹던 힘을 짜내 언덕 깊숙이 박혀있던 뿌리를 하나 둘 뽑았다. 소녀가 오지 않으니 소녀에게 나무가 가야 했다. 나무에게 다른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언덕과 분리됐다. 나무는 드디어 소녀에게 갈 수 있어 기뻐했지만 그것도 잠시 온 땅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다시 언덕과 마주했다. 그 후로 영원히 언덕에 그늘은 없었다.
나무는 소녀를 동정해선 안된다. 나무는 그 뿌리를 단단히 박고 있기에 나무다. 소녀를 동정한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