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만들은 어디에 있는가
마더 테레사와 예수가 자신을 위해서 남을 돕는다고 생각했든, 자기를 위해 남을 돕는다고 생각했든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뭐라고 생각했든 그들은 스스로를 위해 행동했다. 정녕 남을 위해 죽을 수 있는가? 나는 그들이 남을 위해 희생한 게 아니라 자기를 위해 희생했다고 생각한다. 예수는 우리 모두가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라고 여겼다. 우리는 하나에서 나왔고 결국 모두 하나다. 너를 위해 죽는 것은 곧 나를 위해 죽는 것이다.
말했듯이 아무도 남을 도우라고 강요한 적 없다. 선택은 순전히 본인의 몫이다. 부모는 아이를 구박하며 다 너를 위한 것이라 말한다. 아이가 그렇게 해달라고 말한적 있는가? 인간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입장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타인을 가늠할 뿐이다. 받는 사람이 사랑이라고 느껴야 사랑이다. 그렇지 못한 사랑은 폭력과 다를 바 없다.
내가 경험한 남을 위해 행동한다는 생각의 가장 큰 폐단은 결국 책임을 그에게 떠넘기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너를 위한 행동인데 왜 받아들이질 못해?”,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어.” 만약 일이 틀어졌을 때는 상대를 원망하게 된다. ‘너를 위해 내가 희생했는데’ 뇌는 보상받고 싶어한다. 자기도 모르는 새 생각한다. ‘내가 너를 위해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나한테 이만큼 줘야지’. 너를 위해 한다는 생각은 기대없는 사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건 순전히 내 주관적인 경험에 의한 생각이니, 어떤 이들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 짧은 소견에서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세상의 이치는 대게 역설적이다. 가장 명확해 보이는 해답이 실은 그 길을 방해하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인 경우가 많다. 나는 모두가 나라고 여기는 것이 사랑의 최종단계라고 생각한다. (이게 진정으로 가능한 지는 차후의 문제다.) 그곳에 너는 없다. 너를 위한 행동은 없으며 모든 게 나를 위한 행동이다. 부모는 자식을 나로 여기기에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그들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긴다.
나는 늘 버스에 탈 때 기사님에게 인사한다. 나를 위해서다. 기사님이 기분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쁘다. 나는 24년을 살면서 나 말고 인사하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남을 돕는 다는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해사에서 산책을 다니면서 종종 쓰레기를 주웠다. 그러나 나 말고 그런 사람은 한번도 보지 못했다. 남이 보는 명예를 중요시 하는 해사인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가? 얼마 전 공유 자전거 보관소에 자전거들이 모두 쓰러져 있어 일일이 세워놨다. 그곳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아무도 자전거를 세운다거나,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이 사례들이 모든 걸 대변하진 못한다. 내가 잘했다고 칭찬받고 싶은 것도 아니다. 나는 늘 나라도 잘하자고 생각한다. 나도 부족하기만한 사람이지만 나를 위해 남을 돕는다는 생각이 남을 온전히 돕지 못하게 만든다는 생각에는 절대 동의하지 못한다.
헤세는 싯다르타에서 그렇게 훌륭한 사상을 남기고 위대하다고 칭송받는 브라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말보다 행동이 세상을 바꾼다. 행동하고 그 행동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찾은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이것이다. 적어도 나에게 지치지 않고 오로지 남을 위해 행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나를 위해선 지치지 않는다.
내가 나를 위해 남을 돕는 다는 것이 마치 세상의 해악이 되는 것처럼 여기는 위선자들을 보면 치가 떨린다. 내가 세상을 좀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선행을 베푸려 노력하고, 남을 돕고,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려고 할 때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했는가. 나는 애초에 사람들에게 기대하지 않는다. 그들이 선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도 요구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냥 나를 방해하진 말아 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나에게도 그들이 그럴 것이라는 기대는 아직 버리지 못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