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범론(1) : 빼앗긴 영웅
비범론은 인간이 평등하지 않다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어떤 생각은 다른 생각보다 우위에 있으며,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보다 탁월하다. 그러나 탁월함이 존재의 우열을 나타내는 개념은 아니다. 탁월함은 우월하고, 반대로 탁월하지 못함은 열등하다는 계단식 논리가 아니다. 모든 것에 서열과 우열을 나눠야 직성이 풀리는 근대인적 사고는 여기서 배제된다.
아직 미흡하지만 서서히 모양을 갖춰가고 있는 비범론을 나는 5개의 사고가정의 순서로 설명하고자 한다. 가장 처음은 영웅에 관해서다. 이 순서는 절대적인 사고의 시간에 따른 과정은 아니며, 난잡하게 흐트러져 있던 개념의 구름들을 정리하기 위해 임의로 설정한 것이다. 이 글의 목적 역시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자 함이며, 이러한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대다수임을 알기 때문에 내 생각을 어느정도까지 드러낼 수 있는 지와 의미를 명확히 전달하지 못하는 표현의 문제가 있음을 미리 밝힌다.
영웅은 만들어지는 것인가, 태어나는 것인가. 초기 리더십 이론인 특성이론은 리더와 팔로워를 구분하는 리더만의 특성이 존재한다고 가정하고 이를 찾으려 했다. 이를 위인 이론이라고도 부르며 리더와 보통 사람의 타고난 차이에 주목한다. 하지만 리더가 가진 고유한 특성 따위는 없다는 주장이 대두하며 유능한 리더와 다른 사람 간 행동의 차이가 둘을 가른다는 행동이론을 거쳐, 모든 상황에 적용 가능한 특성이나 행동은 없으며, 개별 상황에 따라 적합한 리더십이 있다고 주장하는 상황이론이 등장한다.
홉스테드는 문화를 연구하며, 문화를 성공과 재력에 가치를 두는 남성성 문화와 유대관계, 삶의 질 등에 가치를 두는 여성성 문화로 구분하였다. 현대사회는 다양성 존중을 넘어, 모두가 존중받아야 하는 일명 PC즘이 판친다. 즉, 사회는 점점 여성화되어 간다. 남성성과 여성성 중 어느 것도 다른 것보다 우월하지 않다. 다만 그 균형이 흐트러졌을 때 위기가 발생한다. 지나친 남성성 사회에서는 서로 죽고, 죽이는 살육게임이 개최된다. 그러나 여성성 사회에서는 다양성의 병폐가 내부부터 썩어들어가 구성원들을 서서히 죽인다.
그들은 무엇이 잘못된지도 모른 채, 아니 오히려 그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옥죄인다. 모두가 자유롭다는 것은 결코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이다. 모두가 고귀하다는 뜻은 아무도 고귀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 다양성을 강요받는 구성원들의 다양성은 역설적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들은 노예가 된다. 이 ‘보이지 않는 족쇄’는 남성성 사회의 가시적인 족쇄보다 강력하고 위험하다.
사회와 그 구성원은 별개의 개체다. 사회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숨 쉬며, 사고하고, 자신만의 끌림의 중력을 갖는다. (내 ‘중력’이랑 너의 ‘경향성’이 유사한 개념이라면 이 개념을 통일하고 싶은데, 언제 한번 그거에 대한 글을 좀 써줬으면 좋겠다.) 사회에게 이로운 것이 언제나 그 구성원에게 이로운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회는 존재의 유지를 원하기 때문에 그 강력한 중력에 구성원들은 끌려간다. 진화가 개별 개체에게 행복과 효용을 가져다주는 방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유발 하라리의 주장과 일맥상통한다.
영웅의 존재를 지우고 모두가 일반적인 특성을 갖게 하는 사회의 중력을 ‘일반화 전략’이라 하겠다. 사회는 일반화 전략을 통해 영웅의 말살을 시도한다. 사회보다 강한 중력을 갖는 영웅의 출현은 사회에겐 큰 위협이 된다. 여기서 영웅 담론이 시작된다. 영웅이 만들어진다는 말의 의미는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니 충분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누구나 영웅이 될 수 있다.
아주 달콤하고 매력적이다.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영웅이 되려 노력하고 분투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 누구도 영웅이 될 수 없게 만드는 고묘한 시스템이 숨어있다. 노력하면 누구나 서울대를 갈 수 있다고 믿는가? 지금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됐는 지 보라. 오히려 경쟁은 처절해지고, 평범한 이들이 타고난 영웅의 자리를 차지한다. 갈 곳을 잃은 영웅은 자신이 영웅으로 태어난 줄도 모르고 일반적인 삶을 살아간다.
영웅 분명히 태어난다. 인간은 결코 평등하지 않다. 이 사실을 인정해야 옳은 방향으로 진보한다. 인간은 언젠간 반드시 죽는 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삶을 더 의미있게 채울 수 있는 것처럼. 아무도 영웅이 될 수 없는 사회에선 영웅의 개념은 희미해진다. 우리는 영웅의 지위를 빼앗겼다. 영웅은 이미 멸종 위기종이다. 왜냐하면 사회가 그렇게 되길 원하기 때문이다. 영웅이 줄어들수록 구성원의 중력 대비 사회의 중력은 점점 더 거대해진다. 상황의 악화는 가속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