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물었다.
베드로가 물었다. “형제가 제게 죄를 짓는다면 저는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번이면 됩니까?” 그러자 예수가 답했다. “너는 네 형제를 일흔 일곱번도 더 용서해야 한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옛날에는 예수의 말씀이 그저 지혜롭고, 따라야 할 격언이라고만 생각했다. 난 그를 존경했다. 하지만 이 구절을 읽을 때는 존경이라기보단 의구심이 들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거야..?” 나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눈물을 막으며 책을 내려놓았다. 왜 그래야 하지? 난 왜 형제의 죄를 일흔 일곱번도 더, 몇 번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거야?
예수는 그 아래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말씀이다. 빌어먹게 거룩하다. 결국 이것이다.
“그렇게 하는 게 너에게도 이롭다.”
지성은 무지성을 상대할 수가 없다. 모든 화살은 언제나 지성을 가진 사람에게 돌아오기 마련이다. “네가 이해해라.” “네가 참아라.” 말이 통하는 건 늘 내쪽이었으니 나는 참는 와중에도 참으라는 말을 들어야만 했다. 그게 나의 업보다. 진정한 지식의 저주는 바로 이것이다. 더이상 무지성에 머무를 수 없다. 난 그 영역에서 추방당했고, 내 자아와 영혼이 살아있는 한 다신 그 근처도 갈 수가 없다.
나는 이제 예수를 존경함을 넘어 그에게 연민을 느끼고 말았다. 그가 걸어온 길이 무척이나 안쓰럽고 서글퍼보인다.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구멍뚫린 그의 손의 입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는 자신을 십자가 못 박은 이들마저 용서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많이 자신을 죽여야만 했을까.
유튜브에서 INFJ에 관한 영상을 보았다.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INFJ들이 어떻게 종교지도자가 될 수 있었는지에 관해서다. 이들은 이상주의자이자 완벽주의자이다. 쉽게 결합할 수 없을 것 같은 이 두가지 특성은 모순적이게도 하나가 된다. 이들은 먼 이들에게 선을 보고, 가까운 이들에게 악을 본다. 이들은 러시아 군인이지만 러시아를 증오하고, 우크라이나인들을 동정한다. 그 결과 이들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 이러한 특성이, 선에 대한 갈망이 (그게 비록 도덕적 선이 아닐지라도) 사람들을 움직이는 것이다.
문제는 그렇기에 이들은 자기 자신에게서도 선과 악을 본다. 스스로에 의해 고통받을 운명인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은 총살을 당했고, 간디는 식음을 전폐했으며, 만델라는 감옥에서 30년을 살았다. 그리고 예수 역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 모두가 예수가 되고, 모두가 히틀러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결코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없다.
예수는 사람들에 의해 못 박혀진 게 아니라 스스로 십자가에 올랐다. 비참하고 거룩한 최후다. 이 문제에 이렇게 깊고, 심오하며, 골똘히 생각해 본 사람, 아니 반드시 사랑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도 자신의 철학과 신념에 무너지고 다시 일으켜세워진 사람이 있을까? 그를 만나보고 싶다. 저마다 심연은 있을 것이다. 난 그의 눈을 통해 그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더 깊은 곳으로, 심연으로 잠수하다보면 그 끝에 도달할 것인가. 그게 사실 그가 아니라 나의 심연이었더라면.
아흔 아홉이 저쪽 길로 가더라도, 세찬 바람에 꺼질듯이 휘어지는 촛불 하나 들고 홀로, 울면서라도 저 아름다운 사람 예수가 가신 길을 업보처럼 지고 가는 보기에 안쓰러운 이 세대의 이단자로 사는 복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