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 이론 (수용과 생산, 해방글쓰기)
학습은 두 단계로 나뉜다. 수용과 생산이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개념으로 그동안 여러차례 수용과 생산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 4월 8일 - 글과 글자
진리라는 것들이 대게 그렇듯, 문자 그대로 전해졌을 때는 그 의미가 와닿지 않는다. 글을 읽는 과정은 수동적인 행위이며, 메타인지를 낮춘다. 지식의 창조와 참 나에 대한 이해, 스스로에 대한 앎은 생산과정에서 도출된다. 수용과정은 음, 생산과정은 양이다. 우리는 수용과정을 겪고 스스로 공부했다고 믿지만, 그건 오히려 덜어내는 것이다. 수용과정은 내가 뭘 알고 있는지를 지워버린다.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인지심리학자는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설명한다는 것은 생산과정이다. 즉 우리는 양의 과정을 통해서만 지식을 형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용과정은 무용한 것이냐? 그건 분명히 아니다. 마이너스가 부정적이라는 것은 지극한 자본주의식 편견이다. 무한한 확장과 소비, 생산을 통해서만 유지 가능한 자본주의는 음을 거부하고, 악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음은 그저 양의 대척점의 있는 것일뿐 가치중립적이다. 음이 없다면 양도 의미가 없다. 새로 받아들인 재료가 없는데 무엇을 생산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각설하고, 도구와 예술의 일원론 담론은 수용과정에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생산과정에선 그렇지 않다. 다시말해 글자와 글이 다르다는 건 알지만, 실제로 글을 써보면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글자를 통해 글을 쓰고, 글자의 의미가 담기고, 글과 글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형이하학적인 편견이 가득하다.
→ 수용은 정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예를들면 책을 읽거나, 교과서를 보고, 유튜브나 기타 다른 영상매체를 통해 인사이트를 전해 받는 것이다. 수용은 마이너스 과정으로 수동적이고 메타인지를 낮춘다. 학습의 가장 첫 단계인 수용은 필수적이지만 잘못 복용하면 매우 해롭다.
수용은 ‘알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미 들어본 내용이기 때문에 마치 그것이 내 지식인양 착가한다. 하지만 그건 단지 들어본 적이 있을 뿐 내 지식이 아니다. 이는 학습의 필수적 과정이지만 학습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
수용은 마치 트레이닝 방법론 혹은 스테로이드다. 근성장은 운동을 통해 일어난다. 스테로이드만 맞아도 근성장이 되는 이유는 ‘웨이트’를 하지 않아도 우리 몸은 항상 운동 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동없이는 균형잡힌 근 성장, 즉 이쁜 몸을 만들 수 없고 기형적으로 자라나게 된다.
핵심은 운동을 하는 것이다. 생산은 운동이자 양의 과정이다. 여기서 지식의 근육이 성장한다. 수용없이 생산만 있어도 근성장은 가능하다. 내추럴로도 훌륭한 몸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적절한 스테로이드가 동반된다면? 몸은 미친듯이 불어난다. (난 스테로이드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작용 없이 적절히 활용한다면 굳이 안 할 이유도 없다. )
여기까지가 수용과 생산의 기본적인 원리이다. 즉, 지식의 성장=학습은 운동인 생산을 통해서 발생한다. 그러나 수용과 생산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이클이다. 수용 후에 생산이 정석적이고 효율적인 학습의 방법이다. 독서가 중요한 이유는 가장 효과적인 수용도구이며, 이를 통해 생산성 극대화가 가능하기 떄문이다.
- 7월 21일 - 생산성, 다독-다감-다상량-다작
기본적으로 난 생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역량은 생산을 통해 향상된다. 이 생산량, 생산 효율이 사람마다 제각기다. 그러니 같은 양을 투입해도 생산되는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왜 같은 양을 넣는데 나오는 게 다르지?”라고 불평한다면 그는 바보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무엇이 생산량의 차이를 만드는 지 모르지만 생산량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독 다작 다상량]을 이야기 한다. 나는 한 가지 더 붙여 [다독 다감 다상량 다작]이라고 하고 싶다. 다감은 많이 느끼는 것, 즉 많이 경험하는 것이다. 다독, 다감은 수용과정(-) 다상량, 다작은 생산과정(+)다. 많이 읽고 경험한 뒤 그것을 토대로 많이 생각하고 많이 표현해야 한다. 다독→다감→다상량→다작 순서를 따라야 한다. 수용 없는 생산은 공허하고, 생산 없는 수용은 무의미하다. 생산성 차이는 각 화살표에서 만들어진다. 각 화살표의 생산성 합이 (분명 화살표마다 비중의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 사람이 최종 생산성이다.
→ 앞서 학습의 원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 다음은 ‘어째서 학습량의 차이가 생기는가’이다. 같은 시간을 운동해도 운동효율은 극과 극일 수 있다. 근본적인 생산량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뭐 이를 효율성이라고 번역할수도 있지만 난 생산성이란 표현이 더 옳다고 본다.
다독과 다감은 수용과정, 다상량과 다작은 생산과정이다. 위에 순서도를 보면 알겠지만 수용 뒤에 곧바로 생산이 이어진다. 이 4가지 개념은 딱 나눠지는 것이 아니라 연속적이고 연결된 과정이다. 수용 이후 자연스레 생산으로 이어져야 올바른 학습이 일어난다. 각 단계로 넘어가는 저 튜브의 크기가 생산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좁은 문을 통과하려 하면 어떻게 될까? 이를 해결하기 위해 더 많은 사람들을 집어넣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문의 크기를 넓히면 된다.
수용이 중요한 이유는 사람은 ‘스스로가 모르는 것을 상상하기’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존재를 모르면 그것을 예상할 수가 없다. 불편한 책을 보고, 전혀 관심없던 분야에 접근하고, 나와 다른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을 기르는 것이 수용의 본질이다.
이재영 물리 교수는 인간은 누구나 내면에 천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천재성은 누구나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는 그것을 꺼내는 연습을 해야 하지만 주입식 교육은 외려 집어넣는 것만 가르친다. 생산은 내면의 천재를 끄집어내는 것이다.
학습을 뜻하는 Education의 어원은 educe, 즉 “잠재하고 있는 능력을 끄집어내다.”이다. 잠재하고 있는 천재를 끄집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신은 우리에게 모든 걸 준다. 단 내가 바라는 만큼만 준다. 신은 우리에게 먼저 건내지 않는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만 받을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글쓰기는 생산의 궁극적인 형태이다. 행동으로 옮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행동 후에 글로 기록해야 한다. 글쓰기는 내 안의 천재를 끄집어내는 방법이다. 나는 이러한 개념을 접목해 내면의 천재를 해방시키려 한다. 따라서 나는 이를 [해방 글쓰기]라 명명했다.
수용과 생산이 1개의 set로 이어지며 각 단계로 이어지는 튜브를 키우고, 결과적으론 글쓰기로 나의 천재성을 해방시키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