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성, 다독→다감→다상량→다작
불편한 서점 주인장이라는 블로거의 블로그를 들어갔다. 아마 슬빈이가 서로이웃 신청한 사람인 것 같다. [딱 한마디, 자신있게 남기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저 만큼 책 많이 읽은사람 드뭅니다. 아마 열손가락 안에 들어갈겁니다.] 그의 소개문에 적힌 내용이다. 곧 누적 도서 1,000권에 도달한다고 한다. 1000권을 읽은 사람이 대한민국 열 손가락안에 들어갈 지는 모르겠지만 - 절대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 - 또래 중에선 확실히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블로그를 대충 둘러봤는데 확실히 능력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문득 ‘책을 1000권 읽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그는 정말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뛰어난 통찰력을 지녔고, 척 보기만 해도 세상의 본질을 파악하고, 무엇이든 척척 해내는 사람일까? 책을 1000권, 2000권 읽으면 일반인들은 죽어다 깨어나도 도달하지 못하는 계단위에 서게 될까? 그 사람과 대화하면 예수, 부처와 대화하는 기분일까?
여르미라는 블로거는 1년에 500권을 읽는다고 한다. 해사의 인성상담실장님은 1년에 200권씩 읽고 있다고 한다. 여르미는 2년, 인성상담실장은 5년만 읽으면 1000권을 읽는다. 그들은 10년 20년 후엔 모든 것의 신이 되어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 세상에 모든 것의 신이 몇 명이지?
누누이 얘기하지만 책만 많이 읽는다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닌 듯하다. 레벨업이란 용어가 혼동을 불러온 듯하다. 어떤 몬스터든 몹만 잡으면 경험치가 쌓이고 레벨업이 되 듯 레벨이 오르는 게 아니다.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레벨업이 된다고 생각한다. 난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드는 지 모르겠다. 지금 내 생각의 한계는 ‘되는 사람이 있고, 안 되는 사람이 있다.’ 정도이다.
기본적으로 난 생산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역량은 생산을 통해 향상된다. 이 생산량, 생산 효율이 사람마다 제각기다. 그러니 같은 양을 투입해도 생산되는 결과물이 다를 수밖에 없다. “왜 같은 양을 넣는데 나오는 게 다르지?”라고 불평한다면 그는 바보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나는 무엇이 생산량의 차이를 만드는 지 모르지만 생산량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다독 다작 다상량]을 이야기 한다. 나는 한 가지 더 붙여 [다독 다감 다상량 다작]이라고 하고 싶다. 다감은 많이 느끼는 것, 즉 많이 경험하는 것이다. 다독, 다감은 수용과정(-) 다상량, 다작은 생산과정(+)다. 많이 읽고 경험한 뒤 그것을 토대로 많이 생각하고 많이 표현해야 한다. 다독→다감→다상량→다작 순서를 따라야 한다. 수용없는 생산은 공허하고, 생산없는 수용은 무의미하다. 생산성차이는 각 화살표에서 만들어진다. 각 화살표의 생산성 합이 (수학적으로 따져본다면 분명 화살표마다 비중의 차이가 있을거라 생각한다.) 그 사람이 최종 생산성이다.
10,000권의 책을 읽었다 하여 헤세보다 삶의 정수를 잘 녹여낼 수 있을까? 도스토옙스키처럼 인간의 근원적 감정을 건들 수 있을까? 고타마 싯다르타처럼 자기와 자아를 분리해 열반에 들 수 있을까? 니체처럼 삶을 투쟁의 장으로 만들어 사람들을 매혹시킬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처럼 이론만으로 세계를 예측할 수 있을까? 뉴턴처럼 세상의 이치를 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이 천재라고 불린 이유는 그들이 세상 누구보다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이 아니다. 어쩌면 세기의 천재들 중 책을 1000권도 안 읽은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화살표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거대했을 뿐이다. 이 중 한 가지가 비대하다면 전체가 증가하는 지, 아니면 전체적으로 균형적으로 높아야 혁신적인 생산성을 만들어 내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책을 많이 읽었다고 모든 걸 깨우친 사람이 되진 않는다. 내가 책을 적게 읽었다고 그들보다 멍청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화살표의 크기를 키우는데 집중하다. 다독은 첫 단계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