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mart Rabbit
이현승의 개인 홈페이지[자기소개]

네번째 살인 (5)

작성 2022.06.27분류 글주제 예술과 철학

홀로 지내는 건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다. 원채 말이 많은 성격이 아니었던데다, 목 꺽인 유령의 저주로 인해 막힌 말문을 억지로 열려는 노력이 오히려 나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니 차라리 아무하고 대화하지 않고 지내는 것이 마음 편했다. 녀석을 죽인 뒤로 달라진 나였지만 좋은 방향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옳음으로 가는 길도 옳은 것일까? 사실 그때까지도 내가 다시 손에 피를 묻히리라곤 예상하지 못 했다. 두번째 살인은 K를 만나고 난 후이다. 대학에서 만난 K는 실로 처음 접해보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는 독특한 회색눈을 가졌다. 아주 멀리서도 그 잿빛을 보면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낮은 채도를 띄는 그의 눈동자를 보고있으면 그 속에서 나도 몰랐던 나를 발견한다. 그의 눈은 회색이지만 그가 보는 세상은 더 없이 다채로운 듯했다. 눈동자에 써야할 색까지 그의 시신경으로 쓰여져 오히려 그 색을 잃었던 것일까. 그의 눈은 가장 칙칙했지만 그가 보는 것은 가장 화려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어느새 그와 나는 친구가 됐다. 유독 크고 검은 동공을 가진 나와 회색눈을 가진 그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그와 잘 지냈던 것은 아니다. 한 번 피 냄새를 맡아버린 들개는 어슬렁 어슬렁 다음 사냥감을 몰색하기 마련이다. 동족포식을 경험한 뒤에는 무리에 어울릴 수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나는 하루종일 책상에 앉아있었다. 척추 뼈 마디마디 사이에 무거운 추를 메달아 꼬리뼈가 의자에 파묻혔다. 등과 등받이 사이에 간격만큼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공허한 시선을 일정한 간격의 차트에 헌납했다. 미래 인류는 아무래도 의자와 한 몸이 될 것이 분명하다. 슬개골이 퇴화되어 더이상 발바닥으로 지면을 만질만한 힘이 남지 않은 인류는 자기부양 의자위에서 하루를 보내야 할 것이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는 진화의 과정에 있었다. 등가죽이 녹아내려 까슬한 폴리에스터와 엉겨붙었다. 어디부터가 의자가 어디부터가 등인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오직 손가락만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 본체는 뇌가 아니라 손가락이었다. 나는 손가락에 의해 움직였다.

손가락은 성격이 급하다. 손가락은 제 갯수만큼의 인격을 가진 터라 동시에 10가지 일을 수행할 수 있었다. 가끔씩은 서로 부딫쳐 날카로운 딱딱 소리를 내기도 한다. 그러면 참을성 없는 손가락은 이내 다른 손가락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손톱이 자라나면 손가락 끝이 뾰족해진다. 나에겐 더이상 손톱을 정리할 시간 따윈 없었다. 손가락은 끊임없이 정사각형을 오가며 동일한 압력을 행사해야만 했다. 때로는 검정색 스크린에 밝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때때론 숫자와 씨름하며 골머리를 썩기도 했다. 하지만 손톱깍을 여유는 없었다. 손톱은 자라났다. 타이핑을 할 때는 손가락을 쫙 펴서 손톱이 키보드에 닿지 않을 수 있었다. 문제는 머리를 감을 때다. 도무지 길어진 손톱으로 머리를 감을 수가 없었다. 머리를 감으려면 손 끝으로 두피를 여기저기 마사지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날카로운 손톱에 긁혀 상처가 났다.

악수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만큼 긴 손톱을 가진 사내와 악수하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회인이라면 무릇 악수가 기본 소양이지만 나는 번듯한 사회인으로서의 역학을 수행할 수 없었다. 악수를 하려 손을 내밀 때마다 사람들이 내 손톱에 찔려 도망가기 일쑤다. 나는 씻지도,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눌 수도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뾰족한 손톱을 가진 사람을 위한 나라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K는 달랐다. 언제는 그가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움켜쥘 수 없는 내 손톱을 한 번 바라보곤 그의 악수를 거절했다. 상처입히는 데 골머리가 나있던 지경이었다. K는 회색눈으로 의미심장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돌아갔다. 다음날에도 K가 왔다. 그는 이번에는 악수를 청하지 않고는 덜컹 내 침대에 누웠다. 그는 두 손은 공손히 배 위에 올리고 천장을 바라봤다. 그의 손가락은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는 손톱을 매주 깍는다고 했다. 그 다음날도 그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언제나 생긋생긋 웃고 있었다. 얼굴에는 의지가 있었고, 작은 만족섞인 미소를 보여줬다.

나는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았다. K가 내게 왔을 때도 내 손가락은 한시도 쉴 수 없었다. K는 그런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 했다. 왜 손톱을 자르지 않냐고 물었을 때 난 도저히 그럴 시간이 없다고 대답했다. 대꾸조차 하지 않고 그를 성가셔 하는 나를 K는 왜 계속 찾아오는지 의문이었다.


A Smart Rabbit|GitHub|LinkedIn|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