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의 단순함
불교 철학은 정말로 신묘하다. 인간의 삶에서 깨달을 수 있는 궁극의 정수를 담았다. 단순함이 인간을 구원한다. 사람들이 믿어야 할 것은 신도, 자연도, 사이비 교주도 아닌 단순함이다. 단순함이란 건 졀묘하게 가벼움과 맞닿아 있다. 어쩌면 단순함 없는 가벼움은 앙꼬 없는 찐빵, 김치 없는 라면, 주호민 없는 침착맨 방송이다. 물론 난 앙꼬 없이 찐빵을 먹을 수 있고, 김치 없이 라면을 먹고, 침착맨 홀로 나와도 그의 방송을 볼 것이다. 하지만 그만한 재미는 없겠지.
우리의 삶을 구원하는 것은 물질만능주의 비판이나, 인간 실존 문제, PC주의 등이 아니라 지극히 단순한 철학이다. 어떻게 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삶을 더 열정으로 채울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 단순함은 굳이 어려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단어들로 표현해도 아무나 쉽게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수용자 스스로 보안프로그램을 깔고, 이러저리 쪼개고 해체해 암호화 한 뒤 그걸 다시 블록체인으로 만들어 해독할 수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붓다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수행한 뒤 깨달음을 얻었고 그것을 3가지로 표현했다.
- 모든 것이 덧없다.
- 모든 것이 고통스럽다.
- 모든 것이 실체 없다.
얼마나 단순하고 아름다운 표현인가. 모든 것은 영원하지 않기에 고통이며, 그렇기에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진리는 가장 단순한 형태로 온다. 부처는 가장 훌륭한 수행자이자, 가장 훌륭한 철학자이자, 가장 훌륭한 문학가였음이 틀림없다.
여기서 고통은 산스크리트어가 한자로 번역되면서 생긴 오해이다. 고통의 산스크리트어 원어의 참뜻은 “불만족과 긴장상태”이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통해 고통을 이기려한다. 하지만 그런 즐거움의 추구는 필연적으로 불만족을 유발하고 현재에 만족할 수 없게 되어, 나는 영원한 불만족에 빠지게 된다. 나는 죽을 때까지 불만족 할 것이다. 즐거움으로 괴로움을 덮으려고만 하니 영원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고, 끊임없이 즐거움만 추구한다. 우리는 오로지 현재에만 살 수 있는대 미래에 즐거움을 위해 현재는 늘 불만족 할 수 밖에 없고, 평생 불만족만 느낄 것이다.
이 모든 게 납득될 수 있는 이유는 첫번째 전제 - 영원한 것은 없다-가 있기 때문이다.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 우리의 삶도, 세상도, 기쁨과 슬픔도, 쾌락과 고통도, 그 어떤 것도 유한하다. 그 유한에서 무한을 찾고자 하니 우리는 늘 불만족할 수 밖에 없다. 삶이 유한하니, 즐거움을 추구하려는 시도는 불만족을 야기한다.
새벽은 새벽에 눈 뜬 자만이 볼 수 있다. 부처는 참말로 새벽형 인간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는 매일 아침 새벽을 보았던 것인가. 지금의 나는 그가 전해주는 새벽의 향기를 상상한다. 나도 새벽에 눈 뜨고 싶다. 오늘부터 집 앞에 보리수 나무를 심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