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는 부자유 속에서 꽃핀다.
최근 교수님과 연락을 하던 중 내가 물어봤다. “도대체 언제쯤 쉴 수 있는 거야?” (서로 반말함) “음.. 내 경험상 그렇게 길게 쉰 적은 없는 것 같아. 난 퇴근 후의 시간을 즐겨야지~” 뇌리에 무언가 스쳤다. 그녀가 퇴근 후의 삶을 즐길 수 있는 것은 퇴근이 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그녀가 퇴근을 할 수 있는 이유는 출근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면 퇴근도 없고, 퇴근 후의 삶을 즐길 수 없다. 그녀는 고된 노동 후 지친 몸을 이끌고 이태원 수제 버거 집에서 햄버거와 수제맥주 한 잔을 즐길 수 없다. 그녀에게 일하는 날이 없다면 쉬는 날도 없다. 나는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 자유는 부자유 속에서 꽃핀다.
백수는 쉬는 날이 없다. 백수는 매일매일이 두 눈을 가리고 사막 한 가운데를 걷는다. 오아시스는 어딨지도 모르는데 앞조차 볼 수 없다. 유튜브 영상에서 대기업에 다니다 워라밸을 찾아 6개월 공부 후 9급 공무원으로 임용된 뒤 그곳에도 워라밸을 없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퇴사한 뒤 개인 사업을 한다는 사람 이야기를 보았다. 이게 뭐지 싶다. 나는 잘 못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부자유에 처해있고 자유를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자유에서 벗어나려 뛰쳐나갔다. 하지만 정작 부자유가 없자 자유도 없어졌다. 퇴근 후에 맘 놓고 놀지 못한다. 당직이 없는 주말에 연인을 만나 맛집을 찾아다니지 못한다.
고통이 있어야 쾌락이 있고, 불행이 있어야 행복이 있다.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세상은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둘 중 어느 것을 없애려고 노력한다면 결국 둘 다 잃는다. 행복하기 위해 불행을 없애려 들면 역설적으로 행복도 잃는다. 행복하기 위해선 불행을 인정해야 한다. 삶이란 그런 것이구나. 다들 덜 노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뭐 해사를 나온 것을 후회한다는 말은 아니다. 슬빈이도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자유는 부자유 속에서 꽃핀다.” 우리가 줄곧 해왔던 결핍이 있어야 행복이 있다는 말이다. 이말을 이해에서 해석으로 넘어왔다. 삶이 무엇인지 이해했다. 여기서 삶이란 존재나 형이상학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진짜 보고, 듣고, 만지는 삶. - 사람들이 살아가는 현실세계 - 왜 사람들이 그토록 열심히 사는지 받아들였다. 왜 그들이 평범한 삶이 최고라고 말하는지 알았다. 아.. 이 감정을 어떻게 말해야 회의론자 같이 보이지 않을까? 어떻게 표현해야 이젠 평범함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추구하겠다는 말로 들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계속 비범한 인생을 추구하고 싶다. 비범한 순간을 잡고 싶다. 답답하다. 난 회의주의자, 염세주의자로 보이고 싶지 않다. 단지 깨달았을 뿐이다. 세상이 모순덩어리라는 걸. 그 모순이 세상을 형성했다는 걸.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내 해석을 남들에게 전달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이것도 내가 전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아예 전달하려는 시도조차 안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나도 아직 제대로 정립이 안 된 걸지도..)
이 깨달음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또 나의 태도를 크게 변화시킬 것 같다. 모순과 역설을 인정하는 것. 그게 가장 큰 차이다. 세상의 괴리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고통, 부자유, 불행,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 사실 표현만 달리했지 이미 많은 이들이 이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정말 평범한 24세 (22세인가) 남성인 나조차 깨달은 것이라면 부처, 예수, 공자 등은 몰랐을리 없다. (내가 지금 뭔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편으로는 다르게도 생각해봤다. 만족과 불만족을 이원화해서 생각한 것처럼. 이것들도 사실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것이라면? 그러니까 자유 속에도, 부자유가 있고, 부자유 속에도 자유가 있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를 높이고 부자유를 줄이는 선택을 해야할까?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항상 자유로울 수 있고, 항상 만족할 수 있고, 항상 행복할 수 있나? 이것들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다. 사실 결핍이 충족을 낳는다는 개념은 이원적으로는 성립이 안된다. 하지만 나는 만족-불만족 이론은 포기하고 싶지 않다. 만족과 자유는 별개로 봐야할까? 애초에 모든 개념을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하려 하는게 멍청한 짓일지도 모르겠다. 각 개념들의 성격은 서로 다르고 이들을 하나의 묶음으로 통합할 수 있는지는 미지수이니까.
이것들은 오늘 집으로 오는 전철에서 문득 든 생각이다. 뭔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중구난방의 개념들이지만 나에겐 나름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전철에서 깨달음을 자주 얻는 것 같다. 영감이 필요할 땐 전철을 타야할까? 1호선은 나에게 스티브 잡스의 차고다. 세계적인 소설가 스티븐 킹은 뮤즈를 기다리지 말고, 뮤즈가 언제 찾아오면 되는지 알려주라고 말했다. 뮤즈는 영감이다. 영감은 찾아 나선다고 찾을 수 있는게 아니다. 할머니도 영감이 어딨는지 모른다. 그냥 영감이 올 수 있도록, 영감이 내 방문을 두드릴 때까지 집에 있으면 된다. 에디슨은 4000권(맞나?)의 노트를 썼다고 알려져있다. 4000권에서 그의 1%의 영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