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Smart Rabbit
이현승의 개인 홈페이지[자기소개]

도덕경

작성 2023.01.01분류 독서주제 A. 세계·사회·철학

책
도덕경
저자
노자
읽은 날
2023.01.01

출판사: 현암사 · 추가 개념: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 상대성, 실존적 고독, 무위

키워드

  • 존재와 비존제계 (1장)
  • 상대성과 관계성 (2장)
  • 어떻게와 무엇을 (3장)
  • 자기부정 (7장, 13장)
  • 물처럼 되기 (8장, 58장)
  • 도인의 특성 (15장)
  • 실존적 고독 (20장)
  • 훌륭한 덕 (38장)
  • 도는 웃음거리 (41장)
  • 무위 (43장, 44장, 48장)
  • 지자불언 언자부지

인용구

“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참된 도가 아니다.” - 도덕경 1장

“나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완성한다.” - 도덕경 7장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 부처

“진리는 역설이다.” -키에르케고르

“어리석은 자는 심중에 하느님이 없다.” - 시편 53장 1절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 - 볼테르

“도둑맞지 않으려 꽁꽁 싸매면 오히려 도둑의 관심을 끌고 도둑맞기 쉽다” - 장자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 고린도전서 8장 2절

“이해된 신은 신이 아니다.” - 크리소스톰

“브라만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그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진다.” - 우파니샤드

내용

  • 존재와 비존제계 (1장) 인간은 존재를 당연시 여긴다. 왜냐하면 우리는 비존재계를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각의 유무가 그것이 있고 없고의 문제를 좌우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존재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은 존재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선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의문은 갖지 않는다. 이렇게 생각하면 존재란 참으로 이상한 게 아닌가 싶다. 존재가 있다면 당연하게도 비존재가 있어야 한다. 있음이란 것은 없음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삶은 죽음을 포괄한다. 죽음은 정상상태, 삶은 비정상상태이다. 그렇다면 비존재계도 마찬가지다. 비존재는 존재를 포괄한다. (죽음 ⊂ 삶 / 비존재계 ⊂ 존재계) 노자에 의하면 비존재계는 인간의 욕심을 가진 감각으로는 다다를 수 없다. “무는 무 이상이다. 애초에 무라는 개념을 존재계로 한정지었기 때문이다. 도는 존재하지 않는 것 (체험의 영역, 혹은 영적인 영역, 믿을 수 없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도를 정의하는 것 자체가 도를 존재계로 함축시키는 것이기에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참된 도가 아니다.

  • 상대성과 관계성 (2장)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자체가 추함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착한 것을 알아보는 자체가 악함이 있다는 것이다. 가짐과 못 가짐은 서로의 관계에서 생긴다. 어렵고 쉬움, 길고 짧음, 높고 낮음도 관계에서 비롯한다. 따라서 성인은 무위로써 일하고 말로 하지 않는 가르침을 수행한다.” 부자유가 있기에 자유가 있고 추가 있기에 미도 있다. 그렇다면 자유는 선이고 부자유는 악인가? 마찬가지로 인간이 지각하는 존재는 악이고 도가 따르는 비존재는 선인가? 그렇지 않다. 도란 존재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도를 추구하는 것은 비존재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존재계에 산다. 존재계는 악이 아니다. 존재계에서 도와 덕을 행해야 한다. 도덕경에서 말하듯이 모든 것은 상대적이고 그 관계성에서 생겨난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탈피하고 존재계의 속박에서 벗어나 생각해라. 여기서 성인이란 “남보다 잘 감지하는 사람”을 뜻한다. 이들은 만물의 참됨과 그러함을 깨닫고 자유롭게 물 흐르듯이 사는 사람이다. 성인의 무위란 진실된 삶을 뜻한다.

  • 어떻게와 무엇을 (3장) “훌륭한 이를 떠받들지 마라. 사람사이 다투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귀중하다는 것을 귀히 여기지 마라. 훔치는 일이 없어질 것이다. 탐날 만한 것을 보이지 마라. 마음이 산란해지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가 훌륭하다면 필연적으로 훌륭하지 못한 이가 생긴다. 무위는 이런 것이다. 하지 않음으로써 무언가를 행한다. “어떻게”는 종종 ‘나는 다를거야’라는 허상을 심어준다. 어떻게에 의존해선 안된다. 때로는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잘 하는 것보다 나을 때가 있다.

  • 자기부정 (7장, 13장) “나를 비우는 것이 진정으로 나를 완성한다.” 자기 부정이 곧 자기 긍정의 길이라는 것을 말한다. 노자는 부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자신을 죽이라 말한다. 자아는 헛되고 허상을 좇으며, 위선과 기만의 세계에 산다. 나를 죽여야 진정으로 자유를 얻게 된다. 여기서 나를 죽이는 것은 다음을 의미한다.

    1. 나를 죽여야 한다는 깨달음
    2. 나를 죽일 용기
    3. 참된 나를 찾는 지혜 또한 노자는 “수모를 신기하게 여기고, 고난을 내 몸처럼 여기라” 하였다. 이는 칭찬이나 비난에 일희일비하는 것은 도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마음은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탐욕스러운 자아는 인정과 사랑을 갈구한다. 하지만 그런 억지된 마음이 진정한 평화와 자유에서 멀어지게 만드는 원인이다. 법구경에서 부처는 “육중한 바위가 바람에 움직이지 않듯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칭찬이나 비난에 흔들리지 않는다.” 하였다. 또한 공자 역시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에 염려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않음을 염려하라.”고 말하며 자아를 없애 욕심에서 해방되라는 조언을 남겼다.
  • 물처럼 되기 (8장)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 물은 온갖 것을 위해 섬길 뿐 그들과 겨루는 일이 없다… 겨루는 일이 없으니 나무람 받는 일도 없다.” 패배에 분노하거나 좌절하지도, 승리에 도취되거나 감복하지도 마라. 애초에 경쟁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승패따윈 없다. 뛰어난 이도 떨어지는 이도 없다. 성공과 실패도 없다. 물과 같은 삶이란 다투거나 시기, 질투,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물은 모든 것을 피어나게 하지만 생색내지 않고, 모든 걸 씻어주지만 늘 본래 그대로다. 물은 뒤쳐짐에 조급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아래로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물은 높고 낮음을 따져보지 않는다. 상대주의적이고 소극적으로 살라는 것을 장려하는 것이 아니다. 아놀드는 경쟁이 아니라 이기기 위한 방법을 찾으라 하였다. 조던 피터슨 역시 오직 자신하고만 비교하라고 말한다. 인생은 관점의 차이다. 존재계에 통념에 사로잡혀 실패한 인생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뜻대로 인생을 그려나갈 것인가.

  • 도인의 특성 (15장) 도인은 예의 바른 교양인을 넘어서 남들이 보기엔 뭔가 어색하고 모자라 보인다. 이들은 도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기에 어느 한 가지를 똑부러지게 주장하지 않고, 열린 마음 때문에 “글쎄요”라는 식의 대답만 한다. 흔히 사회에서 요구하는 바람직한 인재상과는 달리 우유부단하고 어리숙해 보이기도 한다. 틀에 박힌 규범이나 주의 주장 등 인위적인 속박에서 자유로운 상태다. 이들은 만물의 상대성, 비가시적이고 체험의 영역인 세계를 이해한다. 그러나 선민의식이나 고결함을 느끼고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모든 것의 근간이 되고 감싸안는다. 세상과 기꺼이 하나되어 세상을 변화시킨다.

  • 실존적 고독 (20장) “선함과 악함은 얼마나 다른가. 군중이 두려워 한다고 나도 두려워 해야 하는가?” “세상 사람 모두 여유로워 보이는 데 나 홀로 빈털털이다. 모두들 뚜렷한 목적이 있는데 나 홀로 고집스럽고 촌스럽다.” 위대한 영혼, 도인들은 고독하다. 이들은 남들보다 빨리 그리고 잘 감지하는 사람이다. 지자불언이고 언자부지이기에 이들은 바보로 취급되고 외로우며 고통받는다. 예수, 공자, 노자 등은 세상이 자신의 뜻을 거부하고 이해하지 못함을 안타까워 했다. 하지만 이것이 성인의 숙명인걸까? 도대체 나는 이 간극을 어떻게 매꾸어야 할까. 나 홀로 올바른 길을 가고 있다면 나는 어떻게 이 길을 유지하며, 해로운 길을 택하는 이들에게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으며 느낀 감정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훌륭한 덕 (38장) “훌륭한 덕을 가진 이는 자기 덕을 의식하지 않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기 덕을 의식한다.” 훌륭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고 뛰어난 지 의식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고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할 뿐이다. 그러나 덕이 없는 이들은 자신의 얄팍한 덕을 과장하고 선전한다. 참삶이란 사회통념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의미를 상대적인 절대성을 발현시켜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사회의 고루한 윤리체계를 비판없이 받아들여 겉으로만 꾸미려 하는 처신의 문제만 고려한다.

  • 도는 웃음거리 (41장, 58장) “뛰어난 이는 도를 힘써 행하려 하고, 어중간한 이는 긴가민가 망설이고, 못난 사람은 도에 대해 들으면 크게 웃는다. 웃음거리가 되지 않으면 도라고 할 수 없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진리는 역설이라 했다. 진리는 상반되는 두가지 명제를 모두 포괄해야 하기 때문에 역설적이다. 한마디로 “세상의 단 하나의 진리는 단 하나의 진리란 없다.”라는 것처럼 말이다. 양자역학에서도 이를 절실히 보여준다. 빛이 파동이면서 동시에 입자일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즉 실제 세상이라는 것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화라고 생각되는 데서 복이 나오고, 복이라 생각되는 데서 화가 숨어있다.” “언제나 옳은 것은 없다. 올바름이 변해 이상스럽고, 선한 것이 변해 사악해진다.” 따라서 도란 맹맹하게 사는 것이다. 맹맹함은 똑똑함과 부딪친다. 똑똑함은 효율성과 철두철미함을 미덕으로 한다. 세속적인 규칙에 얽매이고 속박된 삶, 이분법적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삶 등이 이러한 똑똑함을 추구하며 맹맹함은 어리석고 하찬은 것으로 취급한다. 도는 비논리적이고 비정형적이다. 똑똑함을 거부하지만 한가지 상태를 절대화하지 않고 동시에 포용하여 형용할 수 없는 모순에 빠진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상식인에게 도의 특성 (역설적이고 탈이분법적이며, 상대성을 지닌)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긴 힘들 것이다. 상식적인 이분법의 단선적인 사고방식에 지배받는 현대인들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없다. 볼테르가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할 말이 없으면 욕을 한다.” 세상의 대부분인 못난 사람들에겐 도는 조롱거리고 비웃음의 대상이 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이들은 증거를 대보라 말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길 “어리석은 자는 심중에 하느님이 없다.” 그리스도 역시 이에 관해 “귀가 있는 자는 들으라. 눈이 있는 자는 보라.”고 말한다.

  • 무위 (43장, 44장, 48장) “무위만이 틈없는 곳에 들어갈 수 있다.” 없음은 자기 형체가 없는 것이다. 칼이 얇을수록 더 잘 베고, 물과 공기는 형체가 없기에 어디에나 스며든다. 부드러운 것은 언제나 강한 것을 이긴다. 자기 주장, 줏대만 고집하는 이는 어디에서 섞일 수 없다. 자기를 비운 무애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교류가 가능하다. 무위는 억지로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무겁고 뻣뻣해지지 않는 것이다. 물처럼 묵묵히 할 일을 하고 조급함 없이 순리를 지키며 사는 것이다. “무엇을 지나치게 좋아하면 낭비가 크고, 너무 많이 쌓아두면 잃게 된다. 적당할 때 그쳐야 위태롭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 장자는 도둑맞지 않으려 꽁꽁 싸매면 오히려 도둑의 관심을 끌고 도둑맞기 쉽다고 이야기 한다. 집착은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를 의식하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느라 해가 뜨고 지는 삶만을 살아간다. 무위는 허무주의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가벼움”과 무위는 일맥상통한다. 집착과 기대를 버리고 홀연해 지는 것이다. “도의 길은 하루하루 없애가는 것이다.” 학업은 더하는 것이며, 도는 빼는 것이다. 우파니샤드에서 말하는 neti-neti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이다. 즉 진리는 어느 한 쪽 속성에 국한 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브라만은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지지 않고, 그것을 알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알려진다.” 궁국적으로 무지, 무욕, 무위의 경지에 이를 때 우리는 도의 삶을 산다 할 수 있다.

  • 지자불언 언자부지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 도에 대해 안다고 떠드는 이는 도에대해 무지하다고 말하는 셈이다. 우파니샤드에서도 이와 동일한 말을 하며, 크리소스톰은 “이해된 신은 신이 아니다.” 하였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에서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라 말했고,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는 것 만으로 가장 똑똑한 사람이 되었다. 불교의 공 사상도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물의 궁극 실상은 인간 표현이나 논리의 대상이 될 수 없고, 그것은 인간의 지적 견해를 넘어서 직관적 지혜를 통해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경지라고 말한다.

내 생각

  • 상대적인 절대성: 개개인의 절대성 / 절대적인 상대성: 탁월함 등 → 상대주의의 폐해와 가벼움이 공존하려면 이 개념을 발전시켜야 함.
  • 나를 죽인다는 것은 도대체 뭐인가? 그것이 인간이 도달 가능한 목표일까? 참된 목표인가? 예수, 부처, 공자 등 성인들이 동일한 내용을 말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 탁월한 인격을 가진 이들이 겪어야 하는 실존적 고독을 극복할 수 없을까? 무지한 이들을 도울 방법은 없을까? 예수와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어떤 감정이었을까.
  • 덕을 의식하지 않고 어떻게 덕의 삶을 살 수 있을까? 덕이란 종착점인 걸까? 도를 이해하고 현실에 이를 행하는 것을 덕이라 한다. 덕은 진실된 삶과 행동일까?

참고

learn

Think more


A Smart Rabbit|GitHub|LinkedIn|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