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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파니, 빗 속에서 춤춰라

작성 2022.07.11분류 글주제 인간과 삶

[에필로그]

에피파니라 한다. 갑작스럽고 현저한 깨달음 혹은 자각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이 용어는 과학적으로 획기적인 성과 혹은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인 발견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이는 어떤 문제나 현상을 더욱 새롭고 깊은 관점에서 이해했을 때의 계몽적인 깨달음을 경험하는 상황에서 언제나 사용될 수 있다.

‘유레카 모멘트’를 흔히 경험한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않게 인식됐을 때 나는 그런 격한 벅참을 느낀다. 그러한 것들을 세상 사람들은 에피파니라 부르고 있었다. 뉴턴의 사과가 바로 에피파니다. 낯설어졌을 때 에피파니는 출현한다. 나는 에피파니를 경험하고 노션에 글을 적는다. 적힌 글들에서 또 에피파니를 발견한다. 깨달음의 선순환이다. 에피파니는 그 자체로 경험이기에 특별하다. 이를 통한 영적인 깨달음은 뇌리에 각인된다. 에피파니 자체가 직접경험인 셈이다. 에피파니는 정답이 있는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관점, 신념, 태도, 철학에 대한 것이기에 곧 믿음과 연결된다. 에피파니를 겪으면 믿게 된다.


“요즘은 쓸모 없는 것들의 가치가 각광받는 시기인거 같아. ‘춤’이라는 것은 누군가가 말하길, 아무런 쓸모가 없는 움직임이라고 하더라고. 생각해보면 걷는 것도 아니고, 의미가 막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한국에선 댄서들이 엄청 인기를 끌고 있으니까.”

“빗 속에서 춤춰라.” 라는 말은 두 가지 포인트가 있었다. “빗 속”과 “춤”이다. 나는 여태 빗 속을 집중했다. 고난과 역경, 고통속에서 좌절하여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춤추면서 즐겨라. 나는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즐기는 삶. 내가 추구하는 삶 그 자체였다. 즐기는 방법을 안다면 무엇을 하는 지는 크게 중요치 않다. 왜하는 지 알고, 어떻게 하는 지 안다면 무엇을은 더이상 - 적어도 지금은 -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첫 번째 해석은 어떻게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즐기면서 살아라.”

하지만 오늘 두 번째 해석에 대한 에피파니를 발견했다. 바로 “춤”에 대한 해석이다. 인류는 문명을 이루기 전 아주 원시적인 부족단위 사회에서도 춤을 추었다. 신에 대한 두려움과 경배의 표현, 이성을 향한 구애행위, 커뮤니케이션 수단,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 등 본능적인 꿈틀거림이 태동해왔다. 춤은 상당히 비생산적인 활동이다. 많은 양의 에너지를 소모하며, 이를 통해 어떤 생산물을 만들어낼 수도 없다. 한마디로 실용적이지 못 한 무쓸모한 행위다.

그럼에도 인류가 춤을 추는 이유는 뭘까. 진화적으로 해석하자면 춤을 추는 인류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공작새가 생존에 불리하고 비효율적인 꼬리를 유지한 채로 진화한 이유는 그런 개체들이 이성에게 선택받아 유전자를 남겼기 때문이다. 비생산적이고, 비실용적으로 보이는 춤이 집단의 결속력을 강화하고,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춤을 추지 않는 인류는 쉬지 않고 열매만 따다 죽었을 것이다.

“빗 속에서 일해라, 빗 속에서 토익 공부해라, 빗 속에서 돈벌어라”가 아니다. 빗 속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보이고, 시간 낭비처럼 보이는 일을 해라. 춤을 추는 사람들은 종종 무아경을 경험한다. 세상과 내가 하나되고 온전히 그 행위에 몰입하는 황홀경을 겪는다. 상상해보자. 빗속에서 무아지경에 이르러 춤을 추고 있는 내 모습을. 머리를 흠뻑 적신 채로 물기둥을 세우는 광인의 발재간을.

쓸모없어 보이는 일을 즐길 수 있는가? 그 자는 인생을 즐기는 법을 아는 사람이고, 어떻게를 아는 사람이다. 쓸모없는 일은 편도체를 자극하고 편도체는 생존을 위한 불안을 생성한다. 감히 그들에게 쓸모없는 일을 하라고 말할 수 있을까. 편도체의 자극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알면서 사람들에게 기꺼이 감수하라고 설득할 수 없다. 이것도 또 하나의 딜레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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