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례적 융통성과 정의로운 양심
해사에서는 하나의 정의만 있었다. 바로 명예심이다. 정직한 것은 무조건적인 미덕이며,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가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질이었다. 나는 줄곧 그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나의 신념을 굳건히 지키는 것이 내가 지켜야 할 의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A 선배 신고 사건, 사회에 나와서 여러가지 일들. 이 두 가지를 경험한 후에 나의 신념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해사에서의 정의와 사회에서의 정의는 약간 달랐다. 사회는 살아남으면 정의가 좀 더 통용되는 느낌이다. 오히려 구부러지지 않는 신념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다고 생각되기에 부러지고 만다.
그는 사회부적응자로 낙인 찍히며, 때로는 무능력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사회에는 관례적 융통성이 만연하다. 중대한 잘못은 아니지만 어딘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질 수도 있는. 알바를 구할 때 경력을 과장한다거나, 절세와 탈세의 미묘한 구분 등이 그것이다.
알베르 카뮈는 ‘이방인’에서 느끼는 것 이상으로 말하는 것도 거짓말이라고 정의하며, 설령 목숨을 잃더라도 그런 거짓말을 거부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살아남기 위해선 남을 흙탕물에 집어 던지는 짓은 못하겠다. 하지만 기꺼이 흙탕물에 들어가 춤을 출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빗속에서 춤을 추라는 말은 단순히 역경을 즐기고, 견디라는 의미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허용할 수 있는 정의와 양심의 범위는 어느정도일까. 적어도 지금 내가 가진 나의 본질을 잃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변화를 추구하고 도전해야 함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