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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글자

작성 2022.04.08분류 글주제 예술과 철학

글과 글자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작가는 글자라는 도구로 글이라는 예술을 창조한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연주자의 도구는 악기가 아니라 음계이다. 여러 음계를 조합해 음악이라는 예술을 창조한다. 직관적으로 이해가 안된다면 화가를 생각해보자. 화가는 붓이 아니라, 물감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그림이라는 예술을 창조한다. 하지만 우리는 도구와 예술의 일원론에 쉽게 매료된다.

잠깐 다른 얘기를 해보겠다.

진리라는 것들이 대게 그렇듯, 문자 그대로 전해졌을 때는 그 의미가 와닿지 않는다. 글을 읽는 과정은 수동적인 행위이며, 메타인지를 낮춘다. 지식의 창조와 참 나에 대한 이해, 스스로에 대한 앎은 생산과정에서 도출된다. 수용과정은 음, 생산과정은 양이다. 우리는 수용과정을 겪고 스스로 공부했다고 믿지만, 그건 오히려 덜어내는 것이다. 수용과정은 내가 뭘 알고 있는지를 지워버린다.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게 만든다. 인지심리학자는 설명할 수 없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설명한다는 것은 생산과정이다. 즉 우리는 양의 과정을 통해서만 지식을 형성할 수 있다.

그렇다면 수용과정은 무용한 것이냐? 그건 분명히 아니다. 마이너스가 부정적이라는 것은 지극히 자본주의식 편견이다. (*난 사회주의자/공산주의자가 아니다) 확장과 소비, 생산을 통해서만 유지 가능한 자본주의는 음을 거부하고, 악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음은 그저 양의 대척점의 있는 것일뿐 가치중립적이다. 음이 없다면 양도 의미가 없다. 새로 받아들인 재료가 없는데 무엇을 생산할 수 있겠는가.

아무튼 각설하고, 도구와 예술의 일원론 담론은 수용 과정에선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생산 과정에선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 글자와 글이 다르다는 건 알지만, 실제로 글을 써보면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에겐 글자를 통해 글을 쓰고, 글자의 의미가 담기고, 글과 글자를 구분할 수 없다는 형이하학적인 생각이 가득하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점을 지적했다. 시인의 언어는 글자와 구별된다. 시인이 써내려간 ‘구름’이라는 단어는 실제 하늘에 떠다니는 덩어리를 뜻하는 ‘구름’과 다르다. 다만 그 형태가 똑같았을 뿐이다. 우리가 그림을 볼 때 그 그림 전체의 이미지를 보는 것이지, 물감의 획 하나하나를 인식해서 보는가? 그림처럼 직관적인 경우엔 이게 쉽지만 글은 그렇지 못하다.

글에 예술성을 담기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글자와 글을 구분하지 못하니, 그 글은 그냥 글이된다. 예술로서의 글은 글자와 구분되었을 때 비로소 탄생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위대한 시인들이 쓴 시를 보면 가슴이 황홀해지는 경험을 하는 것처럼, 많이 접하다 보면 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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