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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가지 인생의 법칙 (진중문고)

작성 2023.01.31분류 독서주제 A. 세계·사회·철학

책
12가지 인생의 법칙 (진중문고)
저자
조던피터슨
읽은 날
2023.01.31

출판사: 메이븐 · 추가 개념: 양성순환고리, 원죄, 요약기법, 최소집단 정체성

키워드

  • 양성순환고리
  • 혼돈은 자유다
  • 인간의 자의식
  • 우리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가
  • 인간의 본성
  • 보상을 통한 훈육
  • 선과 당위
  • 인생의 거짓말
  • 무신론자는 없다.
  • 원죄
  • 경청
  • 훌륭한 강사
  • 인간은 사물의 가치를 본다.
  • 과거는 확정된 시간이 아니다.
  • 용 같은 건 없어
  • 모호한 태도
  • 인간은 너무 안전하면 다시 위험해지고 싶어한다.
  •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 지나치게 상냥한 성격
  • 남자는 강해야 한다.
  • 최소집단 정체성
  • 위기일 때 편해지는 방법
  • 모세와 황금송아지
  • 이데올로기의 위험성
  • MZ세대의 도덕교육

인용구

  1. “일단 하나를 얻었다면 더 많이 얻으리라.”
    1. 조던 피터슨
  2. “누군가를 구해주려는 사람은 상당수 순진무구하거나 허영심과 나르시즘에 빠져있다.”
    1. 조던 피터슨
  3.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진실을 얼마나 용인할 수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1. 니체
  4. “이미 알고 있는 것에 안주하기엔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알고자 한다면 언제든지 알아낼 수 있다.”
    1. 조던 피터슨
  5. “거짓말 하는 사람에겐 그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을 기회를 주어라.”
    1. 조던 피터슨
  6. “discipline is everything, without discipline you`re nothing”
    1. 마이크 타이슨

내용

  • 양성순환고리 양성순환고리란 출력이 입력을 늘리는 과정이 반복되어 점점 커지는 현상을 말한다. 이런 현상은 심리에서 나타나는데 부정적인 생각은 부정적인 행동을 낳고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진다. 그리고 부정적인 결과는 다시 부정적인 생각이 된다. 이러한 현상은 믿는대로 된다는 말의 힘을 실어준다. 믿는대로 된다는 말은 신비주의적인 몽상이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신빙성이 있다. 바닷가재는 경쟁에서 패배하면 패배자의 뇌로 변환된다. 그 결과로 세르토닌이 줄고 행복을 낮추고 불안과 슬픔이 증가되며, 경쟁과 싸움을 피하게 된다. 스스로를 패배자라고 인식하면서 이 과정이 반복되고 상황은 악화되어 도태된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세르토닌이 분비되고 더 도전적이고 경쟁적으로 바뀐다. 그러면 다시 승리할 확률이 높다. 즉 “일단 하나를 얻었다면 더 많이 얻으리라.”라는 말이 실현된다. 놀라운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우리의 행동, 생각, 감정이 특정한 결과를 촉발하고 증폭하는 것이다. 웃으면 행복해지고 감사할수록 감사할 일이 생긴다는 것은 그저 느낌이 아닌 과학적 사실인 셈이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은 개개인이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지키려는 의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양성순환고리를 끊어내고 긍정의 고리로 만들기 위해 개개인이 적극적인 의지로 변화를 촉구해야 한다. 인간의 사회는 필연적으로 억압되고 병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좌절하고 세상에 냉소를 던진다면 그런 결과만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일단 하나를 성취하면 다음 단계는 처음보다 쉽다. 물론 처음 두려움과 마주했을 때 극복하기란 매우 어렵다. 특히 선을 믿고, 올바름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강박적인 성격탓에 어둠을 바라보길 거부한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 내면의 폭력성과 악마를 마주하고 절망한 뒤 현실의 냉혹함과 악을 이해하기 시작한다면 스스로를 짓누르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자존감을 높이고 억압에 저항하려는 의지를 복돋운다. 이기는 사람이 계속 이기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작은 마을 출신들이 성공하는 케이스가 많다. 이는 성공을 경험한 사람이 ‘성공의 뇌’로 바뀌어 계속 성공하게 되는 양성순환고리다. 헬스장 원리처럼 내집단내에서만 우월하면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는 인터넷의 발달로 전세계 수많은 사람과 경쟁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잘해도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존재한다. 이들과 비교하면 나는 평생 패배자일 수 밖에 없다. 현재의 경쟁자는 잊어라. 과거의 나보다 1%더 나은 사람이 되려 노력해라. 승리를 경험하는 것은 승리에 안주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고, 경쟁이 아니라 이기는 길을 택해라. 이기는 길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 혼돈은 자유다 혼돈은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다. 이말은 혼돈에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가득차있지만 반대로 생각한다면 혼돈은 새로운 질서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는 뜻이다. 질서는 탐험된 땅이다. 이곳은 정형화되고 엄격하다. 이곳은 안정이 있지만 통제되고 제한적이다. 질서는 혼돈을 부르고, 혼돈은 질서를 부른다. 이 둘은 선과 악의 관계가 아니라 순환적이고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극단적인 질서는 극단적 혼돈만큼 해롭다. 자유를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기꺼이 혼돈을 감수해야 한다.

  • 인간의 자의식 태초의 인간이 선악과를 먹어 선과 악을 구별하게 됐다. 인간에겐 자의식이 생겼고 자신의 존재 이유,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앞으로 뭘 해야 하는지를 의심하게 됐다. 이는 동물에겐 없는 지성이다. 자의식이란 인간이 자연과 분리되어 ‘나’라는 인식이 생겼음을 의미한다. ‘나’는 ‘나 이외의 것’을 불러온다. 나와 너가 됐기에 나는 너에게 상처입히고 해를 끼칠 수 있게 되었다. 인간은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나와 타인, 자연을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게 됐다. 인간에게 자의식이 있는 한 선과악은 반드시 필요하다. 예수님은 말한다. “자기를 남처럼, 남을 자신처럼 대해라.” 이는 인간의 원죄 (자의식)를 씻어주려고 오신 분의 말씀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사람들은 남을 자신처럼 대하라에만 주목한다. 즉 타인에게 잘 해주라는 뜻이다. 하지만 자신을 남처럼 여길 줄도 알아야 한다. 남은 잘 도와주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겐 야박한 사람들이 많다. 나를 노예가 되게 두는 것은 남을 노예로 만드는 것과 똑같다. 어째서 자신을 개발하고 더 나은 삶을 살려 하지 않는가. 우리는 독립적으로 보이지만 아주 긴밀한 관계로 하나처럼 이어져 있다. 자신의 학대가 타인에게는 재앙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렇게 촘촘한 관계 속에서 내가 정말 오로지 나만의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다. 우리는 긴밀한 관계와 긴밀한 책임으로 이어져있으며, 나 자신또한 미래와 과거의 나에 대한 책임이 있다.

  • 우리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가 “누군가를 구해주려는 사람은 상당수 순진무구하거나 허영심과 나르시즘에 빠져있다.” 타인을 구원하려는 시도는 선의 과시, 관심받기, 도덕적 우월감 등의 이유로 의심해볼 수 있다. 이건 사실 꽤나 쉬운 선택이다. 타인에게 입바른 말을 하며 위선을 부리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다. 정말 어려운 길은 그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내면의 목소리에 진실되게 응답해야 하며, 나 자신을 구원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느다. 오히려 그런 시도는 비인간적이고 감수성이 부족하다며 욕을 먹기 쉽다. 그러나 사실 피해자에게 아무런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는 건 그가 주체적인 인간임을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상황에서 모든 인간은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을 반성하고 되돌아 봄으로써 성장한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었고, 사회니 가해자 탓만 한다면 무엇도 바뀌지 않고 자신은 영원히 수동적인 피해자로 남는다. 모든 문제를 부패한 사회 탓으로 돌린다면 개인문제의 해결은 사회번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개인과 사회, 남과 여, 자식과 부모 등 집단을 나누고 이분화하여 문제를 한쪽의 잘못으로 기인한다면 반대쪽의 주체성을 인정하지 않고 복잡한 세상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극단적이고 전체주의적인 이데올로기에 빠지는 것이다. 이것은 더 나은 삶을 살기를 거부하는 무책임한 행동이다. 어려운 길을 피하고 무책임이 주는 기만적인 안락함에 안기고 싶은 인간의 얄팍한 속임수이자 방어기제다. 성공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실패는 쉽다. 우리는 아주 자주 쉬운 길을 택한다. 쉬운 길은 대개 실패하는 길이다. 우리는 어려운 길을 택해야 한다.

  • 인간의 본성 인간의 본성은 혼란과 혼돈이며, 사회는 오히려 질서와 안정이다. 우리는 자유를 갈망하고 규율과 전통을 등한시한다. 이는 혼돈을 불러온다. 역사적으로 인간의 폭력성은 본성이며 규제와 억제가 도덕과 윤리를 불러온다는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더욱 현명해져야 한다. 역사와 문학, 신화 등 인류가 쌓아올린 지혜를 과소평가하지 마라.

  • 보상을 통한 훈육 아이들은 훈육과 처벌이 필요하다. 오히려 폭군으로 보이는 것을 두려워해 아이를 자유라는 명목으로 방치하면 아이의 인격을 망치는 길이다. 마치 아기가 울때마다 안고 달래주는 것보단 오히려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엄격하게 대처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처벌이 아니라 보상으로 훈육하는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초기 행동 심리학자 버러스 프레드릭 스키너가 고안한 방법은 목표의 구성요소를 잘게 쪼개 부담없이 수행할 수 있게 나눈 후 성공하면 보상을 주는 것이다. 자녀가 행동하길 바라는 목표와 일치되는 작은 행동이라도 한다면 보상(칭찬)을 주면 된다. 그러나 많은 부모들이 목표달성을 보상의 요건으로 본다. 예를들면 아이가 상차림을 하고 싶다면 처음부터 끝까지 아이가 해야 칭찬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선 안 된다. 처음엔 상차림의 구성요소를 잘게 쪼개 엄마가 주는 그릇을 받는 것부터 시작해라. 그리고 몇 발 이동하기 등등. 훈육을 게임처럼 도전과제를 주고 달성하면 칭찬을 해주는 것이다. 내성적인 아이의 성격을 바꾸고 싶다면 말을 할 때마다 칭찬을 해주어라. 아이가 성취감과 인정욕구로 스스로 변하게 만들어라.

  • 선과 당위 요즘 세상에는 선의 가치가 낮아졌다. 기독교 교리와 과학과 실용을 추구하는 현실세계와의 충돌은 계몽주의 그리고 교회의 타락과 맞물려 신을 죽였고, 인간을 뭉치게 하며 내면의 악한 본성을 억누르던 희생(제물) 의식은 실효성을 잃었다. 더이상 사회는 하나의 거대하고 일체적인 가치관으로 융합되지 못하고 개개인의 가치관이 개발되기 시작했다. 이는 재앙이 되었다. 전체주의, 공산주의와 더불어 수많은 비인륜적인 행위들이 정당성을 부여받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은 이제 더는 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 결과 개인이 신이 됐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효용 중 하나는 절제와 희생이 더 나은 현재와 미래를 만든다는 것을 믿게 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이 죽은 이 시점에서도 이 가치는 유지되어야 한다. 개개인이 신이 된 상황에서도 더 나은 삶이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생각과 행동, 도덕적 가치체계를 가장 높은 곳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희생해야 하는가. 악한 본성을 희생하고, 선을 향한 절제를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악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있다.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그들을 타락시키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에 반하는 것들이 선이라 할 수 있다. 조던 피터슨 교수는 인생의 필연적인 고통을 감안할 때 불필요한 고통과 아픔을 줄이는 모든 행위를 선한 것이라 했다. 융은 모든 개인이 개인적인 가치체계를 만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말했으며 이 가치체계는 선을 바탕으로 세워야 한다. 조르바에서 말한 “무엇을 무너뜨려야 할 지는 알지만 그 폐허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할 지는 알지 못했다”는 문구가 적묘하다. 사람들은 무너뜨리는 것에 전념했고, 실제로 신을 죽였다. 하지만 신이 죽은 그 자리위에 무엇을 세워야 할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신의 존재가 우리에게 주는 이로운 점을 잊었다. 이제 우리는 알고있다. 적어도 그 폐허위에 세울 새로운 건물의 기반이 무엇이 되어야 할지는.

  • 인생의 거짓말 알프레드 아들러는 인식과 생각, 행동으로 현실을 조작하려는 시도를 인생의 거짓말이라 명명했다. 이는 진실되지 못한 삶으로 이런 거짓말은 대개 합리성에서 기인된다. 합리성이란 능력은 자만심으로 변할 위험이 있다. “내가 아는 건 옳고, 모두가 알아야 해.”라고 믿게된다. 자신의 합리성을 굳건하게 믿는 사람은 자만심으로 인해 애착이 생기고,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다. 자신이 옳다는 생각이 극단적으로 번지면 인생의 거짓말을 일삼게 된다. 그 후에는 자신의 합리성에 배척되는 현실은 인정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속이는 습관이 생긴다. 거짓말은 꼭 적극적으로 다른 사실을 이야기 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속마음을 감추는 회피도 거짓말이다. 속마음을 감추면 가식적으로 행동하고 이는 의지를 약화시킨다. 그러면 역경을 이겨내지 못한다. 큰 거짓말은 작은 거짓말들로 이루어진 것처럼, 작은 거짓말은 큰 거짓말이 된다. 지금 당장의 침묵이 사회를 변들게 하고 나도 사회의 일원이니 그 결과 나도 병든다. 빅터 프랑클이 “개개인의 기만적이고 거짓된 삶은 전체주의 사회의 전조”라고 말한 것은 이러한 맥락이다. 프로이트 역시 “억압이 정신질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치며, 진실 억압과 거짓말의 본질은 같다”고 설명한다. 이로써 거짓말이 삶의 구조를 왜곡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할까? 그건 이성과 합리성의 문제다. 단지 많고 적음이 아니다. 근본적인 무지가 해결되지 못한다면 아무리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보여도 거짓말을 하게 된다. 무지는 언제나 진실된 삶이 이로운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가 진실된 지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없는 상태다. 무지상태에서 이성은 스스로와 사랑에 빠져 자신의 창조물을 사랑하고 숭배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합리성은 자체의 고유한 능력과 그 능력으로 만든 것을 미화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합리성은 태생적으로 합리성 밖에는 아무것도 없고, 중요하지 않다고 믿게 만드는 요인이다. 진실된 삶을 위한 전제조건은 무엇일까. 이는 아주 많고 어렵다. 하지만 온전한 이성이 중요한 요소임은 틀림없다. 온전한 이성은 오직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그 뿐이다.

  • 무신론자는 없다. 조던 피터슨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꿈을 실현하려 애쓴다. 이런점에서 무신론자는 없다. 그저 자신이 어떤 신을 섬기는 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은 신념과 믿음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우리는 과거 누군가의 사상의 잔재이며, 알게 모르게 수많은 철학자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우리는 선대의 철학자 없이는 지금과 같은 사고를 할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종교는 인류가 쌓아온 방대한 철학이다. 그 누구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 인류에겐 믿음 즉, 신이 필요했다. 그렇지 않으면 개개인이 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을 믿지 않는 이는 단 한명도 없다. 다만 그게 종교적으로 드러나진 않을 뿐이다.

  • 원죄 나는 생각했다. 어째서 인간은 태초의 인류가 지은 원죄 때문에 역사 내내 고통받고 시련을 겪어야 하는 것일까? 이건 너무 부당한 처사 같았다. 하지만 원죄의 의미는 이러했다. 삶은 언제나 고통이다. 이는 불변의 진리다. 삶은 혼돈이고 자유고 고통이다. 그러나 삶의 고통에는 이유가 없다. 삶이 인간을 증오하고 저주해서 고통을 주는 것인가? 어쩌면 인위적인 이유를 갖다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유가 있다해도 그건 부당하며 잔인하고 냉정하다는 면에서 본질적으로 원죄와 같다. 인류는 원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사함받기 위해 신을 믿으며, 희생 제물을 바친다. 인류는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도 않고 심지어 인식조차 없는, 지은 적없는 죄를 위하여 신을 두려워하고 숭배한다. 그리고 구원받는다. 오직 신을 믿고 희생하는 자들만 구원받는다. 이들은 부당하더라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떤 이유에서건 나에겐 분명 원죄가 있다. 그렇다면 이를 인정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부당함을 저주하며 자포자기 할 것인가는 순전히 선택의 문제다.

  • 경청 경청에 대한 교과서 적인 말은 많이 한다. 하지만 실전에서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는 막막하다. 인본주의 심리학자 로저스는 이에 대해 실용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말한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정확히, 그도 마음에 들도록 정리한 후 내 의견을 말해라.” 바로 요약기법이다. 화자의 입장에 동화되어 정확하게 읽어내고 그 사람이 흡족하도록 요약해서 다시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려운 이유는 듣는 과정에서 나를 없애 그와 동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의 주관이 그에게 지나치게 많이 영향을 받는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만큼 그에게 이입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주의할 점은 기술적인 면에만 치우쳐 허수아비 논법을 사용해선 안 된다. 이는 상대의 견해를 왜곡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논법이다. 특히 내 주장과 상반되는 논리에 대해 상대의 의견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부정적인 단어를 통해 왜곡하고자 하는 유혹이 생긴다. 그런 식으로 승리했다는 기분에 도취되고 싶지만 그런 말로 상대의 생각은 전혀 바뀌지 않으며 오히려 상처뿐인 승리, 혹은 패배가 될 뿐이다. 요약기법은 상대의 말에서 원인과 결과, 배울점 등에 집중하는 것이다. 마치 100달러 뭉치 속에서 위조지폐를 찾는 심정으로 말 속에서 중요한 핵심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나누고, 핵심만 이해한 뒤에 요약하는 것이 핵심이다. 나는 자주 상대의 논리의 허점을 비집고 들어가려 한다. 하지만 허점은 보완해주고, 이야기의 핵심, 상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집중해보자.

  • 훌륭한 강사 훌륭한 강사는 군중이 아닌 개개인을 보며 강의를 한다. 몇 사람을 찍고 그들의 반응을 살피면서 전체가 아닌 몇 명에게만 말한다는 느낌으로 말해보자.

  • 인간은 사물의 가치를 본다. 인간은 대상 자체가 아니라 도구와 방해물로 지각한다. 그것의 쓰임, 용도 등으로 지각을 하고 이는 쓰임이없는 물체를 배제하게 만든다. 이러한 사실은 합리성과 함께 지각의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을 낳는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계획과 행동에 들어맞고, 해낼 수 있는 것만 인식한다. 이는 세상을 기능적인 면, 그것도 아주 협소한 면으로 단순화하게 한다. 그러나 그 대상의 목적은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은 아니므로 우리가 인식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상호작용하는 대상까지 자아로 확대해 한 몸처럼 사용한다. 이렇듯 자아와 세상의 경계가 명확해 나 이외에 것은 공감, 감각, 지각할 수 없다. 이를 뇌 과학적으로는 부주의 맹이라 한다.

  • 과거는 확정된 시간이 아니다. 과거는 현재 나의 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왜곡되고 조작된다.

  • 용 같은 건 없어 잭 켄트의 동화로 용이 나타났지만 용 같은 건 없다는 엄마의 말이 용을 더 키워 결국 집은 날아가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무시하려 해도 용은 존재한다. 오히려 우리의 태만, 거짓, 기만, 무지가 용을 키운다. 나는 교훈보단 이런 동화를 그려낸 비결이 궁금하다.

  • 모호한 태도 삶이 정체되고 혼탁해지는 데도 모호한 태도를 고집하는 이유는 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며, 문제를 규정하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은 문제를 규정하는 순간 문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리다의 말로 사실은 없고 해석만 있다는 뜻이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으로 해체주의 적이며 현실세계가 해석 (특히 권력자 등)에 의해 억압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그러한 해석을 인지하고 억압에서 탈피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조던 피터슨은 단 하나의 인과관계로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없다고 말한다. 사실은 그것이 왜 사실인지 스스로 이유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 세상에는 다양한 해석이 있고 모든 해석이 유효하진 않다. 어떤 해석은 유해하기도 하며, 유효한 해결책은 무척 제한적이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주장처럼 세상을 억압하는 하나의 해석이 있는 게 아니다. 사실, 세계, 현상 등에 관한 무수한 해석과 사실-해석, 해석-해석 간 긴밀한 관계가 세상을 이룬다. 해석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유효하고 이로운 해석은 소수다. 우리는 그것을 찾아야 한다. 사실과 현상으로 나뉘고, 인지와 이해, 그리고 해석으로 나뉜다. 모두 실존하며 각자의 역할과 의미가 있다.

  • 지나치게 상냥한 성격 지나치게 상냥한 성격은 의존성 성격장애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는 여성에게 발현될 때 오이디푸스적 어머니가 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녀들은 ‘난 오직 너만 위해 산다.’ ‘나를 떠나지 마라. 그러면 난 너를 위해 어떤 일이든 하겠다. 넌 어떤 것도 책임 질 필요가 없다. 너의 잘못은 모두 다른 사람탓이다.’라는 무언의 압박을 아이에게 준다. 이는 아이를 과잉보호하고 아이의 영혼을 황폐화하는 짓이다.

  • 남자는 강해야 한다. 남성은 의존적이어선 안 된다. 사악한 여성들은 아들을 의존적으로 키운다. 하지만 깨어있는 여성들은 오로지 깨어있는 남자만 원한다. 남성은 강한 남성을 요구하고, 여성들도 그를 원한다. 강해지는 과정은 큰 고통과 시련, 담금질이 있어야 하지만 지나치게 여성화된 사회는 이를 용납하지 않는다. 순종적인 상대를 원하는 여성은 대개 자기연민이 강하다. 남성은 자신을 채찍질하고 서로를 채찍질하면서 강해진다. 이 과정에서 해답을 찾고 성장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의존적으로 되거나 (짝을 못찾음) 파시스트 적으로 (역효과) 변한다. 타고난 성별 차이는 분명히 있다. 같은 현상을 보더라도 성별에 따라 받아들이고 이겨내는 방식이 다르다. 남성성은 분명히 존재하며 이는 거친 방식으로 제련되어야 한다.

  • 최소집단 정체성 사회심리학자 헨리 타이펠이 주장한 개념이다. 그는 실험을 통해 사람들을 임의의 집단으로 나눈 뒤 한 참가자에게 돈을 나눠주라고 했다. 이들은 아주 잠깐동안 본 사이인데다 집단을 묶은 데는 어떠한 이유도 없지만 참가자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사람들에게 더 많은 돈을 나눠줬다. 즉,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에게 편향성을 보인다는 뜻이다. 이는 얼핏 당연해 보이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다. 사실상 그 집단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집단이 아무 규칙없이 임의로 설정된 것이라도 같은 집단이라는 표현, 느낌, 인식 만으로도 아무런 유대없이 편향됨을 의미한다. 이는 인간은 사회적이면서 반사회적임을 보여준다. 자신의 팀이 있으면 상대팀도 자연스레 생긴다. 인간은 아주 쉽게 팀을 이루고 타집단에겐 적대심 (사소하지만 편향된 마음으로)을 드러낸다. 사람들을 협조하게 만들고 싶은가? 아무 의미가 없더라도 팀원으로 만들어라.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싶은가? 그들이 하나로 뭉치지 못하게 해라.

  • 위기일 때 편해지는 방법 힘든 일을 겪을 때, 큰 고민이 있을 때 문제는 그것에 몰두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고민해도 결코 답은 나오지 않으며 시간과 정신을 소모한다. 해결 법은 그 문제에 관해 생각할 시간을 따로 정해놓고 그때만 생각하는 것이다. 고민시간을 따로 정해놓고 그 시간안에만 집중해라. 그리고 나머지 시간에는 고민시간을 생각하면서 고민을 뒤로 미뤄라. 마음은 한결 편해지고 고민은 더 잘 해결된다. 뇌에서 불안을 담당하는 부분은 계획의 세부내용보단 계획의 여부에 더 영향을 받는다. 즉, 계획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불안이 줄어든다. 또한 계획을 세우려 할 땐 시간 단위를 짧게 생각하는 게 좋다. 다음주가 막막하면 내일만, 내일이 걱정되면 1시간 뒤 만, 10분 뒤, 5분뒤,,, 지금 어려울수록 사소한 아름다움, 순간에 주목해야 한다.

  • 모세와 황금송아지 창세기에서 모세가 십계명을 받고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황금송아지를 숭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세가 없어지자 통제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했지만 점점 타락해갔다. 얽매이는 걸 싫어하는 이들은 그 명령이 유익한 것이라도 거부할 것이다. 이들에게 그게 이로운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자신이 속박받는 다는 “느낌”이 싫은 것이다. 사람들은 종종 법칙에 큰 거부감을 느낀다. 언제나 자유를 원하고, 통제에서 벗어나고 싶으며, 거대 권력, 계층 등에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신을 짓밟고 있는다고 느낀다. 하지만 법칙이 없으면 우리는 욕망의 노예가 된다. 적절한 통제없이 마음대로 두면 우리는 곧바로 목표를 낮추고 수준 낮은 것, 쉬운 길을 택한다. 그게 인간이다. 우리에겐 질서 (규칙, 명령, 통제)가 필요하다. 마치 적절히 제한할 때 창의성이 더 생기고, 부자유에서 자유가 꽃 피는 것과 동일하다. 질서는 더 나은 삶(균형)을 위해 필수적이다. 타이슨이 말했다. “discipline is everyting, without discipline you`re nothing” 규율없이는 조금만 힘들어도 바로 그만두게 될 것이다. 인간은 나약하고 의지와 동기만으론 현실을 바꿀 수 없다.

  • 이데올로기의 위험성 세상엔 온갖 이데올로기가 가득하다. 이데올로기는 철학이나 과학으로 위장하지만 사실 복잡한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려는 교조적인 주장에 불과하다.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이데올로그들은 스스로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방법을 안다면 오만을 떤다. 루이스 퓨어는 그의 저서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그]에서 “이데올로기는 종교적 이야기를 대체한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설화적이고 심리적인 면을 탈색해 재구성 한 것에 불과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데올로기에서 이야기는 바는 그 자체로는 그릇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를 표현하는 방식과 사람들에게 인식되는 방식이 문제다. 이데올로기는 인류 역사에 걸친 통찰과 과정, 관계의 방대함과 상호성을 무시한 채 그 속에 있는 단일 요소를 진리인 양, 세상의 정답인 듯 선전한다. 이런 홍보는 파괴적이다. 왜냐면 그건 진리의 일부분이기에 맞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각만으론 결코 충분하지 않다. 또한 이러한 재구성은 훨씬 명료하고 직설적이다. 설화적, 심리적인 요소를 주관적인 언어로 옮겨 적은 것이기에 한정적이고 뒤틀려있다. 그렇기에 오해되고 곡해된 이데올로기가 파괴력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극단적이고 혼돈이 가득하다.

  • MZ세대의 도덕교육 MZ는 상대주의적 도덕성을 교육받은 첫 세대다. 여기선 도덕을 개인적인 가치 판단이란 이름으로 가르치며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는 민족성, 교육, 문화 등에 의해 결정되는 차이일 뿐이다. 나아가 이러한 옳고 그름의 잣대는 또하나의 억압이며 그렇기에 다른 도덕적 가치에 관용과 아량을 베풀어야 한다. 따라서 상대에 대한 도덕적 판단은 최악의 성격적 결함 중 하나다.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모르므로 함부로 조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는 결과적으로 선조들의 실천적 지혜를 전수받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방치된 세대가 된다. 이러한 관용은 무엇도 옳지 않으니 그른 것도 없다고 해석되며 극단적인 이데올로기와 해이, 유익한 전통의 해체로 이어진다. 도덕적 기준이 없다면, 이상적 목표가 없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 이 때문에 허무와 자포자기가 늘었고, 모든 것의 답을 알고 있다는 이데올로그가 증가한다. 하지만 선인들은 이와 생각이 달랐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을 분명히 정의한다. 그에게 미덕이란 삶에서 행복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가장 큰 행동방식이다. 소크라테스는 모순되는 도덕률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허무주의, 상대주의에 빠지는 게 아니라 그 차이를 개관적으로 추론할 지혜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미덕은 항상 균형이며 악덕이라는 극단을 피하는 것이다. 이들에겐 미덕과 악덕의 차이를 아는 판단력이 곧 지혜였다.

내 생각

  1. 자아는 없애는 것이 좋을까? 나’라는 엄격한 구분보단 모든 걸 아우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좋다. 자연과의 분리감은 우리를 결핍되고 두려움에 떨게 만든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간은 여러가지를 욕망하고 이 중에선 이롭지 못한 것도 있다. 만약 애초에 우리가 분리되지 않았다고 믿는다면? 자아는 허상이며 우리가 사실 모두 하나였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분리감을 해소할 수 있을까? 나를 남처럼 대하라는 말은 나를 아껴쓰고 잘 관리하라는 의미이다.
  2. 구세주 컴플렉스는 위선적이다. 나는 타인을 구원할 의무도, 능력도 없으며 책임감도 없이 위선적인 태도로, 스스로에게 진실되지 못한 마음으로 이런 일들이 하곤 했다. 피해자에게도 분명 책임이 있고, 역시 내가 피해자가 된다면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구제하고 책임져야 한다. 하지만 설령 이것이 기만이더라도 분명 효용이 있지 않을까? 위선적인 선의라도 누군가의 인생이 구원될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구원의 주체는 언제나 본인 스스로다. 무위적 선위와 자기개선의지가 만난다면 하나의 삶이 구원되고 이런 기적은 전파될 수 있다. 내가 도움을 받았듯이 타인들도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다. 나의 역할은 최대한 진실되게 선의를 베풀고, 타인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이다. 타인이 더 나은 선택을 찾을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을. 귀인이 되고, 귀인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을.
  3. 난 주로 원인을 구조탓으로 돌리곤 했다. 그러나 이는 원인을 호도하는 것이며 문제해결을 해도 극단적이기에 늘 부작용이 발생했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4. 세상을 기능적인 면이 아닌 물자체로 분해해서 봐보자. 이전에는 당연시하게 지나쳤던 것들의 아름다움, 당연함 속에 숨어있는 가치들을 발견할 것이다. 혹은 미치든지. 우리에게 도구나 방해물이 되지 않아 지각되지 않는 다양한 요소들이 왜 그런 모양, 그런 특징을 갖는 지 고민하자.
  5. 진리가 이야기나 비유로 전달되어야 하는 이유1 객관적, 사실적이라 불리는 언어와 해석은 진리의 조각을 단편적이고 임의적으로 이해한다. 이는 대화의 여지가 없다. 바로 과학적이라는 말의 힘이다. 그러나 이야기나 비유는 무엇도 정해지지 않았다. 따라서 담론과 대화의 장을 만든다. 지성이 있는 사람들의 토론과 논쟁으로 최선의 답을 찾으려 한다. 이처럼 애매하고 모호하기에 균형이며 진리다. 예수는 비유가 천국에 들어올 자와 아닌 자를 구분하기 위함이라 했다. 이는 사람만 얘기하는 게 아니다. 비유는 좋은 씨앗과 나쁜 씨앗을 거르는 좋은 거름망이다. 비유로 전달된 진리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끄는 생각들만 남는다.
  6. 상대주의는 위선인가? 정신과 교수 노먼 도이지가 말했다. “상대주의는 자신을 속이는 위선이다.” 나는 상대주의를 추구해왔는데 나의 이론을 수정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엄밀하게 말하면 난 상대주의와는 다르다. 나는 옳고 그름은 상대적이지만 이로움이라는 절대치를 두었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말은 아무것도 평등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한대는 0과 같다. 이로움의 입장에선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표가 있다. 이를 미덕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게 옳기 때문이 아닌 이롭기 때문에 추구해야 한다. 아직은 뭐가 옳은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이젠 안다. 규정하지 않아도 사실은 사실이며, 사실과 현상, 그리고 그 둘의 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진리는 모호함이며 균형이다. 균형은 상대주의와 다르다. 균형은 질서와 혼돈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참고

learn

Think more

  1. 동화의 주제를 정하고, 상징성, 비유, 표현법 등 기술적으로 익혀야 할 요소는 무엇이 있지? (용 같은 건 없어 - 잭 켄트)
  2. 우리는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가? 설령 이것이 기만이더라도 분명 효용이 있지 않을까?
  3. 무엇을 세워야 할 지 몰라도 잘못된 것이라면 무너뜨려야 하는가? 아니면 무너뜨리기 전에 확실히 해야 하는가? (무엇을 무너뜨려야 할 지는 알지만 그 폐허 위에 무엇을 세워야 할 지는 알지 못했다)
  4. 우리는 어디까지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가? 선한 거짓말은 없는건가?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는 건 아닐까? 그렇다면 무엇은 해야 되고, 무엇은 안 해도 되는 말인가? (”속마음을 감추는 회피도 거짓말이다”)
  5. 상대가 허수아비 논법을 쓴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상대의 견해를 왜곡해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논법)
  6. 데리다 혹은 미셸 푸코가 주장하는 억압에 대한 이론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는 게 이로운가?
  7. 어디까지가 적절한 제한이고, 어디까지가 최선의 자유인가?
  8. 인간사회가 이데올로기 없이 유지될 수 있는가? (이데올로기의 효용은 없는가?)
  9. 자아는 없애는 것이 좋을까? 큰 자아 vs 작은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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